내 인생의 소울푸드 / 엄옥례

 

 

내일이면 남편이 멀리 떠난다. 작년부터 지구 저편에 가서 일하다가 휴가를 받아 왔었다. 떠나기 전날, 소문난 곳에 가서 뱃속은 물론, 허전한 마음까지 채울 수 있는 음식을 먹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나는 남편에게 짜장면을 만들어 먹자고 했다. 문득, 그 옛날 남편표 짜장면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은 친구들과 미팅에 나간 자리에서였다. 그 자리에 나온 사람들은 짝을 맞춘 뒤, 짝끼리 슬금슬금 빠지지 않고 다 같이 어울려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 마디로 별 영양가 없는 만남이었다.

귀가해서 잠을 청하고 있자니 한 사람 얼굴이 천정에 자꾸만 어른거렸다. 내 파트너가 아니라 미팅을 주선한 친구의 파트너였다. 친구에게 넌지시 그가 마음에 든다고 했더니 맨입으로 되겠냐면서도 흔쾌히 내 전화번호를 그에게, 그의 연락처를 내게 전해주었다.

연락을 기다리다가 지칠 때쯤이었다. 그러니까 미팅 후 한 달이 지날 때, 불쑥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전화를 받기도 해서 걷고 있는 발이 땅에 닿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남편과 접속이 시작되었다.

사귀는 동안 약속을 잡으려면 그가 근무하는 회사에 내가 연락하거나 그가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만난 지 한 해가 꽉 차도록 그는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먼저 호감을 보내서 이루어진 만남이었기에 내가 그에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 짐작됐다.

좀처럼 관계의 진도를 빼지 않는 그의 태도와 부모님의 강요로 나는 몇 군데 선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한 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선은 ‘답정너’였다. 그저 형식적으로 선을 보고 끝냈다.

그때 남편은 삼십 대 초반이었으며, 나는 이십 대 후반이었다. 둘 다 그 시절 남자, 여자들의 혼기를 훌쩍 넘긴 나이였다. 내 친구들과 그의 친구 중 미혼은 우리 둘밖에 없었다. 우물쭈물 시간만 보낼 수가 없었다. 그가 나를 집에 초대하겠다는 것보다 오히려 까마귀 머리가 하얗게 쇠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아서 나이를 더 적게 먹은 내가 장난기를 부리며 그의 집에 가고 싶다고 보챘다.

그의 집은 달동네에서도 달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시내에 그런 동네가 있는 줄 몰랐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한국전쟁 후 피란민을 위해 지어졌다는 판자촌이었다. 그의 식구는 슬레이트를 인 나지막한 집에 부엌 딸린 방 하나를 세 얻어 살고 있었다. 일명 ‘하꼬방’으로 불리는 집이었다. 거기에는 뇌종양 수술을 받고 누운 어머님과 직장에 다니면서 한창 멋을 부리는 여동생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까까머리 남동생이 함께 살고 있었다.

내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인지 초라한 방은 나름대로 정리가 된 듯했다. 사방을 휘 둘러보아도 집에는 전화기가 없었다. 인사만 하고 나오려는데 어머님께서 빈 입으로 보내면 서운타며 짜장면이라도 시켜서 먹고 가라 했다. 내가 손사래를 치며 일어서자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예의가 아닌 듯하여 주저앉고 말았다.

사는 형편으로 보아 배달시켜 먹는 것은 큰 민폐가 될 것 같았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갔다. 이번에는 그와 여동생이 방으로 내 등을 밀었다. 여동생이 짜장라면을 사 오는 동안 그는 파, 양파, 당근, 양배추를 곱게 다졌다. 칼질 솜씨가 아주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가 초등학교 때부터 홀로 된 어머님은 밖으로 일하러 다녔기에 동생들을 챙겨 먹이느라 몇 가지 음식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고 했다. 다진 채소를 기름과 짜장으로 볶아서 소스를 만들고 짜장라면을 삶아 물을 뺀 뒤, 그릇에 담고 볶아놓은 소스를 얹었다.

남동생이 두레상을 펴고 행주로 쓱쓱 닦았다. 세상에서 유일한 수제 짜장면과 김치를 차려놓고 식구들이 빙 둘러앉았다. 좋은 음식을 대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어머님은 삭정이 같은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아주었고, 그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정성 들여 준비한 짜장면을 입에 넣는 동안 만감이 교차했다. 그의 길고 하얀 손으로 봐서 집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이토록 궁핍한 형편인 줄 몰랐다. 더군다나 어머님도 큰 병으로 편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혼하게 되면 당연지사 식구들이 다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상황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은 사정과 나와의 연애에 미적지근한 자세를 유지하는 연유를 알게 되었다. 의문은 풀렸으나 관계를 이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궁리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음 한편이 짓눌리는 듯했지만 상냥하게 인사를 하고 골목으로 나왔다. 열닷새 보름달이 구름 속을 헤치고 얼굴을 쑥 내밀었다. 달동네 배꼽마당이 달빛으로 훤해졌다. 달빛 때문이었는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가 잡아당기는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부드러운 그의 손길에서 포근함이 느껴졌다. 포옹도 하고 입도 맞추고 말았다. 짜장면조차 시켜 먹을 수 없는 형편일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은 달아나지 않았다. 결국, 그와 함께 삶을 연주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우리 집에도 그를 선보였다. 사정을 들어본 가족은 예상대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버지만 내 고집에 항복했다. 편한 자리 다 밀어내고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길을 택한 딸을 끝까지 말렸던 엄마가 결국 고함을 치며 폭발했다.

“매친년, 얼굴만 쳐다보고 살끼가?”

눈을 치뜨며 한방 고함을 날리더니 승낙 아닌 승낙을 해 주었다.

남편에게 살짝 말했었다. 동반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유 중 하나는 그날 정성을 다해 마련해준 짜장면 덕분이었다는 것을. 가족에게 인사만 시키고 밖으로 나가서 밥을 사 먹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형편대로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식구들에게 먹일 줄 아는 그 마음 씀씀이와 소박한 음식을 정답게 먹는 식구들의 모습에 가슴이 아릿하면서도 뭉클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금은 짜장면을 백그릇도 사먹을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하지만 그날을 생각하며 손수 해 먹자 하니 남편이 나보다 먼저 앞치마를 당겨서 입는다. 외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직접 요리하는 솜씨를 발휘하겠다고 나선다. 나는 남편에게 앞치마 끈을 살며시 매어 주고 냉장고에서 양파, 대파, 감자, 계란, 쇠고기를 꺼낸다. 남편은 재료를 다지고 볶는다. 식구 수만큼 계란과 짜장라면도 삶는다. 고명으로 올릴 오이채도 썬다. 쉐프가 따로 없다.

결혼 후, 봄꽃이 서른 몇 번 피고 졌다. 예전, 그 달동네 집에서 남편표 짜장면을 먹었던 추억이 아슴아슴 피어오른다. 그때 두레상에 앉았던 식구 중에 어머님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여동생은 외국에서 기반을 잡고 식구들을 그곳으로 불러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있다. 지금 식탁에 앉은 식구는 남편과 나, 아들 둘이다. 짜장면에 얽힌 사연을 도란도란 나눈다.

이별이 코앞이라 쌉싸름한 마음이 밀려든다. 하지만 지금 먹는 이 짜장면이 인생의 소중한 추억이 되기를, 고비가 닥칠 때마다 힘을 얻을 수 있는 영혼의 음식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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