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로
양상훈
역사별곡의 뒤안길에 나그네의 서정과 서사의 발걸음으로 긴 여정이 시작 된다. 반만년 역사의 배달민족으로 뿌리를 내리고 태고에 고조선이란 초석을 다졌다. 신라의 화랑정신으로 삼국통일 이룩하여 천년왕국을 지켜왔다. 찬 란한 삼국문화를 일본에 걸어준 백제는 한반도중심에선 막강한 국력이 천하 를 제압하였건만, 배신음모의 야비한 ‘라당연합군’에 계백의 결사대 5천명 이 맞서 싸웠다. 신라삼국통일 과정에 아쉽게 유실된 옛 고구려 영토에 발해 의 집단세력에 흩어진 세력까지 아우러 고려가 통일을 이룩하게 되었다.
북진정책으로 지구촌을 끌어들인 고려는 교역의 전진창구 개성에 세계문호를 활짝 펼쳤다. 처음으로 코리아Korea국호를 명칭 한 황금시대이기도 했다.
고려의 숙적인 거란을 물리친 서희와 강감찬장군은 역사에 민족자존심을 끝 까지 지켜낸 영웅이다, 필자는 작년 한국 방문 때에 영웅의 사적유적지 낙성 대에 전적을 유심히 관람한 적이 있다. 방문 때 마다 설렌 마음이 스며들곤 했다. 낙성대는 서울대입구에 위치하며 캠퍼스입구에 강감찬 기념탑이 우뚝 솟아있다. 인헌공 강감찬 장군이 태어났던 당시 이곳에 별이 떨어졌다하 여 낙성대란 지명이 부쳐졌다고 한다. 세계 속에 반짝이던 고려의 과학과 예 술, 고려청자 금속활자 팔만대장경은 우주를 빛냈고 우리민족사의 위상을 최 고로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말 <요동정벌,위화도회군>이 존망의 갈림길에 선죽교의 비극 ‘하여가’와 ‘단심가’에 일그러진 처절한 국운이여!
쿠테타로 창건한 조선왕조의 사회개혁은 민족의 장도에 혼란을 야기하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민족최대의 수난을 겪으면서 건국 200년 만에 종말을 맞는 듯 했다.
.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제정은 민족의 등불이었다. 과학적인 문자에 독창적인 언어임을 유엔이 공인하며 세계 속 문화민족임을 자부한다.
성웅 이순신 등장은 애국충정과 구국정신의 교본으로 후대가 계승해야 할 정 신적지주이다. 조선후기 3대 (순조,헌종,철종)에 60여 년간 세도 정치로 삼정 의 문란과 탐관오리들의 칼춤에 대원군의 무모한 개혁정치를 몰고 왔다. 사회 혼란 방지와 왕권강화란 미명아래 당백전이 웬 말인가.
나라대문을 철통같이 틀어막아 녹이 쓸고 썩어가니, 프랑스의 병인양요,미국 의 신미양요를 일으키는 개방망치에 척화비로 맞섰으나 손바닥으로 구름을 막을 수 없었다.
암울한 세계정세에 제국주의와 열강의 약육강식은 침략야욕을 야기 시켰다. 결국 일본과의 강화통상조약의 강요에 녹슨 문호마저 열어주지 않을 수 없었 다.갑신정변의 개혁파들이 개화의 깃발을 들고 일어났으나,근대화 운동의 전 환기점이 3일 천하로 끝나버렸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러일전쟁으로 비화되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을미 개혁’이란 일본의 조선 내정간섭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민비시해 단발령 등으로 국권을 도전받기 시작한다.
이어 ‘고종의 아관파천’이 왕권추락을 자초하여 정세가 궁지에 빠지게 된다.
고종은 자주독립의 세파에 따라 국호를 ‘대한제국’ 국왕의 칭호를 ‘황제’라 칭 하기 까지 하였으나, 외세에 의존하던 개혁정부의 개혁(광무개혁)이 종이호랑 이로 외세침투를 방어할 항전이 소멸되어갔다.
러일전쟁의 일본승리로 조정내 암약이 가속화되어 이완용으로 하여금 을사 조약을 체결하는 매국행위는 숨어서 진행되었다. 외교권 박탈, 통감부설치, 고종 퇴위, 군대해산, 조정매국노 집단과 일본과의 거래로 합병조약체결이 1910년 8.29일(국치 일)로 민족의 가슴에 시퍼런 통탄의 날로 각인되고 말았다.
일제에 항거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기시작 국내외로 전파하였다. 하르빈역에서 안중근의사의 의거로 초대 통감부 이또히로부미의 저격사살 (1909)은 세계를 놀라게 한 영웅적 사건이었다.
민족의 울분이 폭탄처럼 터지기 시작하여 독립운동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국내의 민족지도자 33인이 기미년 3월1일 정오 고종 장례날을 택하여 탑골 공원에서 밀물같이 터져 나오며 대한독립만세를 목놓아 행진하였다.
‘대한의 곷‘ 이화여학당 16세 소녀 유관순 학생도 고향 천안 장터에 태극기를 나눠주며 독립만세를 불러댔다. 김구조직 윤봉길의사는 상하이 공원에서 일 본상하이 점령 축하연에 폭탄세례를 퍼부어 장성 여러 명을 사살하여 지도 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전남광주에서는 기차통학 중 한일학생 간에 집단싸움이 광주학생사건으로 비화되었다. 국제정세는 날로 어두워지고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무력강화로 침략을 시도하자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발끈하 면서 세계2차 대전이 발발되었다.
일본으로부터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당한 미국은 대전에 불가피하게 참전하여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무조건 항복에 패망하게 되고
한국은 조국 광복을 맞이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
일본의 패망은 전후 미소 연합군이 체제로 분할점령이 거론되었다.
공산주의 김일성 체제를 택할 것인가 자유민주주의 이승만을 택할 것인가 중 선택하게 되었다. 결국 유엔 감시아래 1948년 5.10일 총선을 실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에 의거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1948년 8.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남북통일정부가 수립되지 못한 채 광복의 환희도 잠시 북한 공산당은 계략대로 모텍동과 스타린의 비호아래 1950,6.25일 새벽 중무 장한 기갑 부대를 선두로 자유강토를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피난민 앞서 3일 만에 한 많은 미아리고개를 탱크로 짓 밝기 시작했다.
남으로 이어지는 피난대열에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여 있을 때에 낙동 강방어선 마지막 사수결의와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이 맞물려 전쟁 의 승기를 잡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했다.
백두산 북진을 감행하는 일대 전환점에 38선을 돌파한지 10일만에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철모에 강물을 담아 대통령에게 바치기도 하 였다. 아! 통일을 목전에 두고 중공군 수백만이 압록강을 건너 인해전술로 두 더지 처럼 덮쳐오는데 혹한에 악전고투 속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흥남부두 철수작전은 동족상잔이 남긴 또 하나의 생이별에 곧 만나리라는 이 산가족은 아직까지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소련의 계산된 휴전요구에 미국도 국내사정을 감안 종전하고 싶으나 한국민의 휴전결사반대에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3년 동안 전 국민이 기아선상에 시달리며 전 강토는 폐허가 된 상황에 아무런 소득 없는 전쟁의 종말은 허망하기만 했다.
1952년 미국 아이젠하워가 빙한 할 때에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반대에 북진 통일을 요구하였다. 휴전반대와 북진통일지지가 1953년 4월 휴전회담해결이 몰아칠 때에 미국은 한국에 대해 가 열찬 경고를 보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 국군을 유엔군과 구별시켜 단독으로 북진통일을 하겠노라고 대립각을 세웠다.
미국은 더욱 압력을 가하자 그해 6.8일 이승만은 <벼랑끝 전술>로 25,000명 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자 워싱톤은 경악하고 세계가 놀 랐다. 비밀리에 이승만을 재거하려는 ‘EverReady' 작전이 불가피하게 시동할 때였다. 그러나 미정부내 혼란을 우려하고 휴전반대 북진통일론은 불리하기에 북진통일이 아니라 한국의 안전보장을 제시하면서 휴전회담에 박차를 가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결국 이승만의 선택은 백악관을 괴롭히는 ’벼랑 끝 전술 이‘성공 한 셈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2개 사단규모의 미군주둔, 한국 군 30개 사단증원, 전력의 현대화로 54년 11월 17일에 정식비준하기로.
1980년 만해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대게 부정적이었다. 90년대부터 새로운 국면에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많은 기밀문서가 쏟아져 나와 한국전쟁 이 남침이라는 것. 이승만은 미국을 상대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정황으 로 당시 북진통일론이 국론을 결집시켜 불안을 억제하고 권력유지면도 있었 다. 이것이 한국의 위상과 대미협상력을 높이는 지렛대에 활용했다는 점이다.
이승만이 투쟁과정에서 한국을 특별 관리대상으로 승화시켜 백악관의 더 많 은 관심에 중요한 비율을 차지하게 되었다.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이 후 모든 대통령이 방한 후 한국대통령이 미의회에 연설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마산 3.15 부정선거의 항쟁시위에 경찰의 진압과정에 한 학생의 희생이 동 기가되어 4.19학생혁명으로 비화 되었다.학생시위대가 경무대까지 진입과정에 정치깡패들의 폭력과 군경의 무차별 사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고 경무대 앞 까지 들어오는 시위광경을 목격한 대통령은 하야를 결심하고 경무대를 나오 게 된다. 부정선거 비화로 집권자유당정권은 4.19혁명으로 퇴각되었다.
장면 새 정부정권은 개혁보다 사회 안정에 실패하고 혼란과 불안한 정국을 초래하는 가운데 1961년 5.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민정이양과 더불어 제3공화국의 등장으로 제2차 경제개발계획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게 된다. 1972,7.4 남북 공동성명으로 상호불가침조약이 체결되고 남북통일의 물꼬를 틔었다.1988년 서울의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와 1991년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은 의미가 컸다. 2000년 6.15일에는 남북최고자 회담으로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 4강 진출의 신화를 창조했다.
반 만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단일 배달민족으로 지정학적인 위치 에서 수많은 외침을 받았으나, 격퇴시켰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는 일찍이 은근과 끈기의 민족정기로 동방의 등불이라 일컬어 왔다.
1970년대부터 경제개발도상국으로 급속한 경제 개발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한국경제는 이제 10대 경제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OCED회원국으로
태평양 경제협력체(ASPAC)에 선진국과의 동반자관계로 활약하고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동방예의민족은 일찍이 함부로 바다 밖에 나가지 못했다. 후손들이 용감하게 바다 밖으로 뛰어나왔다. 조선말에 하와이 사탕수 수농장 고용을 물꼬로 처음 미대륙으로 뻗어나가 미국이민의 효시로
종가집의 둥지를 마련했다. 안에서 없던 것을 밖에서 발견하고 안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바다 밖에서 이뤄내는 아메리칸드림을 실천해왔다. 이상과 보람 을 위해 불타는 역사의 나그네로 짧은 이민사에 성공적인 이민 모델을 창출 한민족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영토 확장이며 국력신장의 길 이다. 한반도의 역사의 수레바퀴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의 나그네.
금수강산 조국을 그리며 신대륙에 반세기 종횡무진으로 방랑객이었다. 대양너 머 너에게로 한 번도 외면하지 않고 다가가리라. 너는 고향이며 어머니 품속 같이 따뜻한 사랑이 넘치고 있다. 너를 잊지 않고 사랑한다.
삼국시대부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을 포함하여 한국 근대사까지 바람따라 스쳐 지나갔네요.
'너는 고향이며 어머니 품속 같이 따뜻한 사랑이 넘치고 있다. 너를 잊지 않고 사랑한다.'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와닿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