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둘째 큰오빠가 1960년대에 미국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자마자, 막내였던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 대학에서는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가르치더라.”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정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지만 사실이었다. 조선 왕조는 500년 이상 중국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치는 ‘조공체제(Tribute System)’ 아래에 있었다. 국가의 중대한 결정마다 중국의 윤허를 받아야 했으며, 명나라와 청나라를 상전으로 삼아야 했다. 당시 중국은 조선뿐만 아니라 베트남, 티베트,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정치와 문물에도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조선은 계유정난을 시작으로 갑신정변에 이르기까지 15차례에 걸친 내란과 외란을 겪으며 태평성대를 이루지 못했다. 신분제가 엄격했던 조선 사회에서 양반 계층은 혈통을 세습하며 부를 독점했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교육 시스템도 철저히 양반 중심으로 운영되어, 서민들에게는 배움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조선이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는 한글 창제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면서 조선은 더 이상 중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지만, 1876년 제물포 조약으로 일본은 교묘히 조선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왕권은 박탈되고, 따라서 국민은 보호막이 될 나라가 없어지게 된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싸움이 시작될 때,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고, 1905년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로부터 한국지배권과 만주 남부 철도부설권을 양도받는다. 강대국 간의 싸움터는 한반도였다.
일본은 1945년 패망할 때까지 동아시아 24개국을 침략하며 식민지로 삼았다. 조선, 만주, 중국 본토, 홍콩, 대만, 동남아시아를 포함해 일본의 영토는 광대했다. 일본 제국주의 아래 놓인 나라들은 강제 징병, 위안부 동원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혹한 희생을 겪어야 했다. 김상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보고에 따르면, 일본 식민 통치 아래에서 조선인 희생자가 8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김 전 관장은 일본의 침략이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아니라 1876년 개항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70년간 지속되었다고 분석했다.
며칠 전, 106돌 삼일절을 맞이했다. 삼일절이 되면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안중근, 유관순, 윤봉길, 윤동주…. 그러나 오늘은 이름 없이 희생된 수많은 소년, 소녀, 그리고 어르신들을 기억하고 싶다. 당시 사진을 보면, 소녀들은 남루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 청년들은 짧게 깎인 머리에 수인번호가 적힌 죄수복을 입고, 푸석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그들의 굳게 다문 입매와 날카로운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만세운동은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원산뿐만 아니라 만주, 일본에서도 일어났다. 각지에서 독립선언문이 발표됐다. 1918년 만주 길림에서 조소앙 선생이 작성한 ‘무오독립선언서’, 이듬해 1919년 2월 8일 일본 YWCA,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앞에서 이광수 선생이 작성하고 영문으로 번역하여 해외까지 보내었다는 ‘2·8 독립선언서’에 이어서, 같은 해 3월 1일 최남선 선생이 작성하고 15명의 천도교 대표, 16명 기독교, 2명의 불교 대표 총 33명의 민족대표가 서명하고 7개의 도시에서 낭독된 ‘기미독립선언’이 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원래 탑골공원에서 낭독될 예정이었으나, 민족대표 33인이 경찰에 연행될 것을 우려해 태화관에서 선언식을 조용히 치렀다. 이후 그들은 스스로 자수했다. 교육자인 정재용 선생은 2만1000부의 독립선언서를 받아 탑골공원으로 갔고,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직접 선언서를 낭독했다고 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독립을 외치다가 투옥되었고, 일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살아남은 이들조차 고문과 수형 생활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이들의 희생을 기록한 문서는 광복 8년 후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정리되었다. 총 67권에 이르는 책자로, 독립운동가들의 이름, 생년월일, 주소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한일회담 당시 협상 자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분실되었다가 2013년 주한 일본대사관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여기에 유관순 열사의 기록도 남아 있는데, 그녀의 주소는 ‘천안군’, 순국 장소는 ‘서대문 경찰서’로 명시되어 있다.
광복 이후에도 한국은 많은 아픈 고비를 넘겼다. 2009년,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을 남긴 4000여 명의 명단이 공개되었는데, 그중에는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 ‘기미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왜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의 길을 선택했을까.
그들과 같은 운명을 겪은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기록에서 누락된 이들, 반대로 친일을 했으나 유명하지 않아 조용히 잊힌 이들.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을 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 정부는 늦었지만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훈장을 수여하고, 생존자와 유가족을 지원하고 있다. 남편의 외조부 한순회 선생도 그중 한 명이었다. 동학을 계승해 만들어진 천도교의 광주교구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되었고, 사후 30년이 지나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106돌 삼일절, 한국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찬반 시위가 열렸다. 남가주 LA와 오랜지 카운티 곳곳에서는 한인사회가 삼일절 기념행사가 치러졌다. 대부분 대형 교회에서 진행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교인뿐만 아니라 총영사, 교육자, 원로들이 함께했다고 한다.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LA총영사관이 완공되면, 디아스포라 한인들이 그곳에 모여 다 함께 삼일절을 기념하고, 일제강점기 희생된 800만 선조들을 기릴 수 있기를 바란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모니카 류 / 종양방사선학전문의·한국어진흥재단이사장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LA총영사관이 완공되면, 디아스포라 한인들이 그곳에 모여 다 함께 삼일절을 기념하고, 일제강점기 희생된 800만 선조들을 기릴 수 있기를 바란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
저도 그렇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