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 Charity
박진희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여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4).
내게 어릴 적부터 사랑의 정의를 가르쳐 준 구절이다. 그래서 이 '사랑'이 'love'인 줄 알았다. 그런데 King James Version 영문판에 'charity'로 나온 걸 최근 성경을 숙독하다 알게 됐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다. 여기서도 '사랑'은 'charity'로 나온다.
왜 그 단어가 '자선'이나 '자비'가 아니고 '사랑'으로 번역됐을까? 사실 누군가에게 다가가 친절함을 베풀고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사랑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love'로 여전히 알고 있어도 아무런 차이를 못 느낄 것 같다. 그 두 단어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도 힘들거니와 모든 걸 사랑으로 덮어버린 것에 별 무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차이가 뭐지 고민해 보고 싶어졌다. 'charity'는 라틴어 어원으로 'caritas' 크리스찬 사랑이다. 그리스어로는 '아가페'로 나오며 예수님의 삶, 가르침, 죽음에서 보여준 것으로 표현된다.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나 깊이가 더 숙성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종교적 용어로 해석하면 될까. '주님의 순수한 사랑'은 인간을 한껏 끌어올려 영원으로 이어주는 하늘의 사랑이라고 간주해도 될 것 같다.
그에 비해 'love'란 인간의 굴레에서 웬만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유와 선택이란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다. 섬기고 배려하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라'며 예수님은 서로 발을 씻겨줘야 한다며 직접 보여주지 않았던가.
charity로서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화장기 없는 거무스름한 피부, 단정하고 수수하지만, 당당한 중년의 귀여운 매력이 있는 나의 미용사 '민'이다.
몇 달에 한 번씩 머리 커트가 필요할 때나 생각을 정리할 때도 그녀를 찾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한국어와 영어도 서툴고 말 수가 적은 그녀에게 왜 나는 사는 일이 얼음장을 걷는 것 같다며 불평을 늘어놓게 됐을까. 40대에 시작한 간호대학 시절로 시작해서 굴곡진 거의 20년간의 인생사를 말이다. 사실 그녀는 한 번도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다. 그러나 난 진작에 알고 있었다. 새벽에 무릎을 꿇고 나를 기도하는 모습이 수시로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너무 벅차서 대학원 옮기길 포기하고 그저 간호사로 만족하며 살아야 할까? 머리가 하얘지게 고민하다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사는 곳에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대학원에 지망하면 앞으로 괜찮을 거예요."
얼마나 기도를 했으면 나의 몇 달, 몇 년이 어찌 될지 알 수 있게 될까? 그로부터 거의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의 말대로 흘러가고 있어 늘 감사하다.
그녀는 한국의 한 호텔에 있는 미용사로 일할 때 만났던 백인 남편 사이에 자녀는 없고 취미도 없지만 외로울 시간이 없다고 한다. 예수님과 항상 연인이나 친구처럼 대화한단다. 시간 나는 대로 성경을 읽는 그녀의 미용실은 하늘 가까이 두둥실 떠 있는 듯한 환상을 준다.
피츠버그에 30여 년 사는 동안 성당에 매일 들러 미사를 하루도 빼먹지 않고 다닌다고 해서 놀랐다. 그 성당에서 어느 할머니가 다가와 속삭이며 그녀의 등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고 한다.
"나의 남편이 암 진단을 받았어요. 기도해 줄래요?"
아마도 그녀는 얼굴도 모르는 그 시람을 위해 어마어마한 시간을 들여 기도했을 것이다. 대학교 근처라서 이곳을 찾는 손님이나 학생들에게도 귀 기울여 절실한 소망과 희망이 이뤄지도록 힘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나 자신이 얼마나 신앙이 깊은지 자랑하지 않으며 기도의 응답이 기적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남이 알아주는데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녀는 예약제로 한 손님과 30분 정도 시간을 잡지만 내게는 한 시간도 넘게 할애해 줘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간혹 그 성의로 선물을 해도 받지 않고, 함께 사진 찍는 것도 원치 않는다. 오직 주님과 내가 직접 소통하며 가까워지기를 원한다. 세속적인 일보다 영적인 교류를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은 종교인과 다르지 않다. 그녀가 바로 charity 자체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여태 받기만 한 사랑을 누군가에게 나눠주고 싶은 내 심정 또한 그녀의 기도 덕분이리라. 우리는 그녀의 일터에서 만난 인연인 데 비해, 그와 비숫한 관계를 내 직장에서 상상해 본 적 없다. 흔히 보는 당뇨병이나 비만증이 심해지는 환자들이나 우울증 등을 겪는 이들을 위해 진심 어린 기도를 얼마나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됐다. 누구에게서나 책임감을 차치하고 'love' 그 이상을 추구하며 바라본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자신을 돌아본다.
직장, 학교, 모임, 어디서든 만나 끌리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모든 것이 잘되도록 소망하는 것을 하나의 love라 여긴다. 그러다 그들을 위해 멈추지 않는 숱한 기도나 순수하고 참된 행위가 하늘에 쌓이게 되는 걸 charity로 정의하고 싶다.
바울이 말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charity가 제일 위대하다는 걸 조금씩 알아채기 시작한 것 같다.
<한국산문, 2025년 1월호>
회장님, 포근한 댓글 고맙습니다.
저도 그래요. charity가 생활화된 분들은 다르죠.
사랑으로나마 살아도 좋겠어요^^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통 NIV verson으로 읽어 왔는데 King James Version 에 love가 아니고 charity로 나와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행위와 실천인 자선과 자비가 강조되었다고 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선생님도 그런 분을 만나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따듯하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군요.
Love 에서 Charity로 넘어간 삶을 사는 사람들, 정말 존경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