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 / 최원현
“대앵, 대애애앵.”
종소리는 신기하게도 십 리가 넘을 우리 집까지도 들려왔다. 교회와 우리 집이 모두 조금 높은 곳에 있다 하더라도 사이에 동산도 두 개나 있건만 수요일 저녁만 되면 어김없이 들려왔다. 할머니는 먼 어두운 밤길은 다녀올 수 없기에 종소리를 들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를 하시곤 했다. 그렇게 중학교 3년간을 들었던 종소리다.
막내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 화요일 저녁이었다. 어머니 대신 나를 업어 키워주신 분이다. 몇 년 전부터 치매로 요양병원에 계셨는데 돌아가신 것이다. 얼마 전 찾아뵈었을 때만 해도 이리 빨리 돌아가실 것 같진 않았었다. 하지만 기름기가 다 빠져나가 버린 뼈와 가죽만 남은 가느다란 몸매와 얼굴은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앉아 있는 것이라 할 정도로 똑같아 나를 놀라게 했다. 나이가 들면 부모 모습이 된다더니 이모의 모습은 아무리 모녀간이라도 저렇게 똑같아질 수 있을까 싶게 닮았다. 할머니도 치매로 고생하다 가셨다. 할머니가 여든일곱에 가셨는데 이모는 일흔여덟에 가시니 9년이나 빨리 가신 셈이다.
새벽 첫차로 이모님이 계시는 광주로 내려갔다. 성공한 세 아들의 문상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빈소에서 이모님과 마주했다. 10여 년 전에 찍었다는 소라 색 한복 저고리를 곱게 입은 영정사진 속에서 이모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원현이 왔냐? 오느라 고생 했겄다.” 사진 속에서 이모는 그렇게 인사를 해왔다. 지난번 병원으로 찾아뵈었을 때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어디서 오셨소? 누구시요?” 하던 이모였는데 오늘은 반갑게 알은체를 하며 맞아주고 있다.
순간 어린 날 들었던 교회당 종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하나 종소리가 들려올 만한 곳은 없었다. 그런데 이모가 “요새도 교회 잘 댕기냐?” 하시는 게 아닌가.
“니 할무니가 세상천지에 네 의지 될 만헌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교회로 너를 데꾸 갔단다.”
이모는 웃는 얼굴 채로 조근조근 할머니 얘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곱게 차려입은 모습도 외할머니 모습이다. 참 정갈하신 분이었다. 십 리 황톳길을 하얀 버선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장에 다녀오셔도 어찌 걸음을 하셨는지 버선에 흙 한 점 튀지 않았고 결코 버선코를 넘어선 흙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할머니를 신기해했다. 그러나 세월에 장사는 없다더니 연세 들어가며 자신이 누군지도 잃어버렸다. 그 길이 뭐가 그리 좋다고 이모가 또 그 길까지 따라 걸었다. 해서일까. 내 어린 날 들었던 종소리로 나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하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로 장례 마지막까지 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내 등 뒤로 “괜찮다. 봤응께 되얐다. 잘 살어라.” 이모의 목소리가 종소리처럼 들려왔다.
왜 종소리였을까. 아마 이모도 나도 멀리 떨어져 살았기에 멀리 퍼지는 종소리처럼 여운을 붙잡고 살았다 함일까. 그렇다고 누가 그 그리움의 끈을 흔들어 종을 쳐 줄 것인가.
“잘 사냐?” “잘 살어라.” 할머니와 이모 두 분 모두의 한결같은 물음이고 순하디순한 그분들만의 나에 대한 축복이고 소원이었다. 나는 두 분의 목소리 여운을 내 가슴에 울리고 있는 종소리로 들으며 두 분 바람의 의미 담긴 잘 사는 일을 남은 내 삶 동안 꼭 지켜가야 한다. 그런데 그분들이 말씀하신 잘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할머니는 평생 나만을 바라보며 사셨다. 참판 댁 장손녀로 태어나 어린 날에는 온갖 부러움을 다 받으며 사셨지만 바람처럼 나다니시는 할아버지 만나 결혼 후에는 어렵게 어렵게만 사셨다. 거기다 딸만 셋을 두신 것도 큰 서러움이셨을 텐데 큰딸 내외에 둘째 셋째 사위를 다 먼저 보내셨으니 그 참담한 가슴을 무엇으로 다독일 수 있었겠는가. 그런 큰딸이 홀로 남긴 세 살짜리의 유일한 피붙이인 나를 보는 할머니의 눈시울은 한시도 마를 날이 없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철이 드는 걸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노래처럼 말씀하셨던 그 걱정 속 할머니의 성화로 일찍 결혼을 했던 나는 다행히 남매를 두게 되었고 딸과 아들은 내게 다섯이나 되는 손주를 안겨 주었다. 그 딸아이의 큰 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까지도 보고 가셨으니 당신의 모든 염려는 기우(杞憂)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내 결혼식 날 돌아가셨다. 결혼식을 막 마쳤는데 돌아가셨다는 부음(訃音)의 전보를 받았다. 신혼여행 대신 상주(喪主)가 되어 5일간 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에 함께 했다. 멋쟁이셨던 할아버지, 그러나 당신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암울한 시대에 가장 평범한 삶으로 살다 가신 분이셨다. 내게는 참으로 엄하셨다. 행동거지 하나, 사람의 도리 하나하나 어린 가슴에 못이 박히도록 심어주셨다. 그러고 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지금까지도 내 삶의 방향을 인도하고 계시는 게 분명하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그리고 이모의 내게 대한 바램은 오직 ‘잘 살어라’였다. 그 ‘잘’과 ‘살어라’의 의미를 아직도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은은한 종소리처럼 긴 여운으로 내 가슴 속을 울리고 있는 말씀이다.
이모는 내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끈이었다. 그 끈도 이젠 끊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젠 그때의 교회당 종소리도 요즘엔 들을 수 없다. 그냥 시간 되면 교회도 알아서 가고 오라고 하지 않아도 갈 줄 안다. 그러나 오라거나 그렇지 않거나 관계없이 울리면 그 의미를 생각했었고 한 번쯤 마음도 가다듬었던 옛날의 그 종소리, 이모님은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까지도 내게 그 울림을 상기시키셨는데 사실 이모님이 내게 들리던 마지막 종소리였던 것 같다. 그마저 끊긴 지금 이제는 그 여운으로나 살아야 할까.
소라 색 한복 저고리를 입고 고운 미소로 나를 보던 이모님, 수요일 저녁이면 들려오던 종소리에 손 모으고 나를 위해 기도하시던 할머니,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하라며 가르침 주시던 할아버지,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게 다 나를 바로 세워주던 종소리였다. 그런데 긴 여운으로 들려오던 그 종소리조차 이젠 자꾸만 놓치는 것 같다. 그런 나는 누구에게 얼마큼의 어떤 종소리가 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