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허해 올 때면 / 곽흥렬 

 

가을이 깊어간다. 계절성인가,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무언가 말로는 풀어낼 수 없는 상실감으로 마음에 허기가 진다.

이럴 땐 무작정 발길 닿는 데로 내맡겨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 산길을 오르고 강변을 거닌다. 공연장을 찾고 전시장을 쏘다닌다. 한동안 그렇게 전전하다 보면 울적한 감정이 시나브로 가라앉곤 한다.

어저께는 문화예술회관으로 걸음이 옮겨졌다. 거기서 뜻하지 않게 ‘어린 시절에’라는 표제를 건 ㅅ화백의 닥종이 인형전시회를 만난 것은 적지 않은 안복이었다. 몇 해 전, 비슷한 주제로 이승헌, 허은선 부부 화가의 인형전인 ‘엄마 어렸을 적에……’를 보고 난 후, 곱게 개켜져 있던 그날의 감회가 불현듯 되살아났다.

기억의 언덕을 더듬어 올라가자 어린 시절의 정경이 눈앞에 선연해 온다. 변변한 장난감 하나, 번듯한 놀 곳 한 군데 없이 그저 나무 막대기가 손쉬운 놀잇감이었고 뒷동산이며 들판, 배꼽마당과 골목길이 놀 공간의 전부였던 지난 시절, 모든 것이 불편하고 아쉬웠던 그때였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그 가난과 궁상에 절어 있었던 시절에도 마음만은 꿈꾸듯 행복했었던 것 같다.

전기가 보급되기 이전, 해가 빠지고 나면 사방이 온통 암흑천지를 이루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집집마다 봉창을 통해 새어 나오는 빤한 호롱불 빛이 전부였다. 비록 그랬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따스한 정의 등불로 세상은 환히 밝았었다.

도회지로 출가하여 종업원이 천 명이 넘는 큰 공장을 운영하며 자수성가했던 대고모님이 어쩌다 친정 나들이를 오실 때가 있었다. 그러면 어둡다 하실까 봐 어머니는 촛불을 서너 개씩이나 밝혀 드리는 특별 배려를 잊지 않았다. 노상 호롱불만 켜다 촛불을 켜놓으니 시골뜨기의 눈에는 마치 대낮 같았다. 그랬는데도 대고모님은 연신 “아이고 와 이리 캄캄하노? 와 이리 캄캄하노?” 하면서 밤이 깊도록 낯선 세상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고, 우리는 졸리는 눈 깜빡거리며 문명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쫑긋 귀를 모으곤 했었다.

몇 시간씩 하염없이 기다리고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던 낡은 시외버스, 그 드물게 보는 탈것의 꽁무니에 붙어 뽀얗게 이는 먼지구름을 마시면서 신작로를 따라 달리는 재미에 마냥 신이 났었다.

오밤중에 손자의 몸이 불덩이가 되어도, 그 시간에 시오 리 먼 길이나 떨어져 있던 의원을 찾는다는 건 오로지 두 다리 힘에만 의존해야 하는 당시의 형편으로서는 언감생심이었다. 대신 할머니의 약손이 육신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었다. 그래도 그때가 애틋하게 그리운 정경으로 남아 있는 것은, 흘러간 시절이 가져다주는 요상한 힘 때문이 아닐까.

생전의 어머니는, 내가 일상사에 매몰되어 주어진 현실에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적마다 호강에 받혀 요강에 똥 싼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뇌시곤 했다. 텔레비전을 통하여 차마고도의 소금 굽는 여인들의 고달프지만 맑고 순박한 얼굴을 만나면서 그 말의 숨은 뜻을 어렴풋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그들은 현대 문명의 혜택을 받아 본 경험이 없기에 그 곤궁스러운 일상 가운데서도 오히려 행복한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너무 부요富饒한 삶에 길들여져 있어서 부족하고 불편했던 지난 시절을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닐까.

편리와 풍요는 추억이 깃들 공간을 앗아가 버렸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언제 어느 때라도 득달같이 대령해 주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아쉬움 혹은 결핍이 갖는 의미를 더 이상 배우지 못한다. 모자람이 없으니 기다릴 것도 없다. 어렵게 만나고 어렵게 헤어지던 뚝배기 식에서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냄비 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기 이야기만 잔뜩 쏟아 놓다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건성으로 흘리는 인사 한 마디씩을 뒤로한 채 각자 타고 온 자동차를 몰고 뿔뿔이 흩어져 간다. 깔끔한 뒷마무리, 구접스럽고 구질구질하지 않아서 참 좋긴 하다. 다만 동지섣달 칼바람 앞에 선 듯 가슴이 시려 오는 것은 어인 까닭인가.

아!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이면 으레 갖게 되는 그 상실감이란, 그동안 잃고 만 흘러간 날들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오늘날의 스피드에 밀려나 버린 아날로그적인 불편함, 그 불편해서 오히려 정겨웠던 그때가 목마르게 그리워진다. 햇반 같은 즉석 먹거리가 아무리 많이 우리의 식탁을 지배한다 하여도, 갈탄 난로 위에 층층이 포개져 점심시간을 기다리던 양은 도시락의 누룽지 맛을 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래서 괜스레 허기증이 도질 적이면 그때 그 시절로 다시금 돌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충동질을 하는가 보다. 그것은 놓친 열차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추억’이라는 정신작용의 속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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