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에 얹혀온 가을이 상처투성이로 보채다가, 어느새 순환의 섭리에 맞춰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촌부들이 내놓은 좌판을 훑어 애호박 한 아름을 안아다 창가에 썰어냈더니, 조금씩 들어앉는 볕 덕분에 오글오글 잘 마르고 있다. 호박오가리와 벌이는 ‘사랑놀음’에 빠지다 보면 애지중지 손자 녀석들 보듬는 듯해서 가을날의 소소한 일상이 행복한 여인네로 만든다. 결벽증(?) 다분한 남편이 창문 열어놓고 산다고 성화가 심해 어렵사리 이 일을 하면서도, 첫서리 전까지 끝 호박 사 나르는 일을 접을 수가 없는 건, 백로가 지나면서부터 도지는 내 유년의 그리움 때문이다.
새발 마냥 가는 다리를 총총거리며 내가 제일 신나했던 심부름은, 저녁 밥솥에 쌀을 안치며, ‘어서 호박 따오라.’시던 엄마의 분부셨다. ‘돌람밭 으로 담방담방 뛰어가 호박순 이리저리 들추다 보면 동그만 토종 호박이 보물처럼 숨어 있어, 조금만 힘을 줘도 ‘똑!' 손안에 들어오는 묘한 쾌감 때문에 난 이 심부름이 좋았다. 호박 두 개를 들고 앙감질 뛰기로 부엌에 들어서면, 말 떨어지기 무섭게 다녀오는 딸애가 대견스러워 엄만 매양 흡족해 하셨고, 그때 길들여진 애호박과의 교감으로 연례행사 같은 이 소꿉놀이가 해마다 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창문 너머로 물살 흐르듯 하늘이 파랗다. 내가 좋아하는 심부름을 힘에 부치지 않게 적당히 골라 시키셨던 어머니! 심부름 때마다 고성 한번 없이 나직이 이르시던 엄마가 거기 웃고 계신다. 그리운 목소리도 선연하다. 부신 햇살에 눈을 감고 있으니, 간밤에 꿈에서 주웠던 가무잡잡한 알밤이 손끝에 잡히는 듯하다. 이맘때면 새벽녘에 홑이불 당겨 덮으며 노상 꾸는 꿈이지만, 날이 밝기도 전에 눈 비비고 달려가 줍던 밤 차래기여서, 이 꿈은 꾸고 나서도 기분이 좋다. 겨우내 뒤란 처마 밑의 오지항아리에 폭 파묻혔다가 고뿔 한 번씩 앓을 때마다, 할머니 손에 딱 두세 톨씩 구워져서 손자들 입으로 쏙쏙 들어왔던 귀하디귀하신 몸. 밤 주문도 서둘러야지 싶다.
무명실 꾸리와도 같은 그리움이 이순을 넘긴 아낙의 뇌리에서 솔솔 풀려나오기 시작하는데, 딸아이에게서 안부가 왔다. 절묘하게도 텔레파시가 통한 걸까?
“올핸 호박 말랭이가 최상품이 될 거야”청정 먹거리 예찬론에 이어 부디 기대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엄마, 그거 아이들이 잘 안 먹어요!”
살갑고 소통 잘 되는 모녀간인데도 제 자식들 입맛에선 종종 제동이 걸린다.
“무슨 소리야? 고생하는 애들에게 이런 걸 먹여야지!”
입시생 학부모로 사느라 아이들 편의에 맞춰가는 딸애가 못내 안타깝다.‘고얀 것! 저 아니라도 나눌 데 많거늘…’애써 평정심으로 돌아오려는데, “거봐, 괜한 짓 하는 거라니까! 느닷없는 남편의 참견이 건너왔다. 살 붙이고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여태 사람 속을 헤아리지 못하니 야속하긴 마찬가지. 이래저래 심사가 편치 않아 집을 나선다.
걸음을 뗄 때마다 와닿는 바람결이 삽상하여 가슴속까지 트인다. 몇 해 전까지도 열심히 걸었던‘태양광 농로(수십만 평의 농지를 지기들끼리 이렇게 비유하곤 한다.)로 내려서니, 누런 꼬투리를 달고 가을 길목을 지키는 샛길 콩밭이 풍요롭다. 고마운 결실이 눈물 나도록 반가워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 자투리땅을 마련하느라 어느 억척스런 농군의 손마디가 또 얼마나 무디어지고 상처로 긁혔을까? 땀내 벤 고이 적삼에 늘 흙 묻은 손이셨던 내 할아버지도 그러하셨다. 순간, 누런 들녘에서 배착지근한 냄새가 스쳐 왔다. 논밭 가까이에 다가서면 더욱 민감해지는 나의 말초적 후각으론, 햅쌀 찧던 날 식구들 밥상에 고봉으로 오르던 딱 그 햅쌀밥 냄새다. 결국 이렇게 오시고야 말 것을 가을 초입부터 하늘은 왜 그처럼 심통 부리며 사납게 할퀴어댔는지 모를 일이다. 황금벌이 가을의 품에서 넉넉한 꿈을 꾸느라 자글자글한 햇살과 어울리고 있다. 나도 넋 놓고 함께하는 취객이 되어 말을 잊었다.
신통치 못한 무릎을 생각하고 쉼터에 앉았다. 혼자이어서 더없이 편안하다. 강산이 다섯 번쯤은 더 바뀌었을 시공을 뛰어넘어 지금 이 가을 들녘에서 유년의 그리움과 조우하는 순간, 베란다 채반 옆에서 피어올랐던 진한 그리움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이 채도 높은 유년의 그림을 꺼내놓고, 난 할아버지 특명을 받아 초가을부터 벼 타작 때까지 새보기를 했던 유년으로 돌아가고 있다. 내(川)를 건너고 제방 둑을 넘어 다시 큰 감나무 밑을 지나야 하는 낯선 동네를 오가면서 내 가슴은 늘 콩닥콩닥 뛰었었다. 짧지 않은 가을 해를 보내느라 봇도랑 건너뛰며 송사리 쫓다가, 생이 가래 건져놓고 점심밥 꺼내 먹고는, 논 가 뽕나무에 앉아 노랠 불렀던 열 살 안팎의 여자아이! 내를 건너다 반은 젖어버린 치마폭이 다 마를 즈음, 축구공만 한 해가 서쪽에 걸릴 때를 기다렸다가, 새줄 한 번 크게 흔들어놓고 돌아서던 우리 집 제일 큰 논배미는, 나의 중학시절 이후 가산 목록에서 전설처럼 사라졌다.
논두렁 밭두렁을 쫓아다니며 무던히도 해냈던 심부름으로 육친에 대한 그리움이 더 절절해진 내 유년의 이력! 남의 식솔이 되어 내 집을 떠나오기까지, 난 조 이삭 수수 이삭 토실하게 여물 어가는 밭 가를 돌아서, 할아버지 손길로 비단결 같았던 우리 집 옥토를 돌아보는 기쁨을 알았던 규수이기도 했었다. 거기에 어진 농심을 교훈으로 받아 순리를 지켜가는 쪽에 서슴없이 설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이제까지 나를 치유하고 다스려온 소중한 가치와 덕목 모두가 유년에 길들여진 따뜻한 심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는 감사히 여긴다.
‘아우님, 내일 가을 바다 만나러 가세. 새 시집을 내고 인터뷰 요청에 바쁜 시인 선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반가움으로 답을 보내고 나니, 그새 집 전화가 와 있다. 조바심 하난 유별난 사람이 지금쯤 마누라 행방에 애를 태우고 있을 게 뻔하다. 그러고는 딸애한테다, “네 엄마 삐쳤나 보다.”며 틀림없이 흉도 봤을 게다. 초로를 한참이나 더 넘겼으면서 이런 날 맘 추스르질 못하는 나도 풀잎이거늘, 객기 점점 줄어가는 남정네 속은 뭐 별 수 있으랴.
가을 미색에 빠져 장시간 그리움을 타다가 일어서니, 대관령 능선으로 해넘이가 시작되려는 찰나이다. 그 시절 강아지풀 대궁에 벼메뚜기 꿰어 달고 저녁 어스름에 돌아오던 하늘도 분명 저랬을 테고, 수수 잎 돌돌 싸말아 가마솥에 갓 쪄낸 차조 송편 돌리며, ‘밭 가운 집 둘째 여식'이 좋아라고 했던 심부름 역시 노을 무렵이었으니, 이 나이의 세월만큼 살아낸 여인네가 사는 방식 역시 아름다운 석양이고 싶다. 젊은 날 사기로 충천했던 정점에서 불꽃같았던 열정은 아니어도, 지금 저 황혼녘처럼 그냥 고운 노을로 타고 싶은 소망 하나쯤은 품어도 되지 않을까? 가슴에 묻었던 불씨가 지펴지는 건지 가슴이 설렌다. 하늘이 짙은 선홍빛으로 물들고 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얼굴이 왜 그리 상기됐어? 안도감으로 누그러진 남편이 조심스레 던지는 말이었다.“가을이 저 혼자 익어 가겠수? 사람도 같이 익어야지! 내 입에서 그럴싸한 말이 노랫가락처럼 흘러나왔다.
‘그래, 익으려면 제대로 익어야지!’ 바로 내 나이에게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