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떠난 여행 / 조정래​

 

나는 자식이라고는 아들 하나밖에 없다. 옛말로 손이 귀해서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하나만 두기로 했던 것이다. 그건 국가에서 많은 돈 들여 벌여온 산아제한 정책에 호응해서가 아니었다. 문학이란 것을 하면서 많은 자식을 키워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고, 사남사녀나 되는 내 형제들과 가난 속에서 부대끼고 다투며 살아온 것이 끔찍스러웠던 것이다.​

 

아들 하나만을 갖게 된 나의 단호한 결정은 좋았다. 그러나 그 결정이 일방적이었다는 것을 아들이 차츰 커가면서 확인되고 확대되기 시작했다. 아이가 외로움을 탔고, 형제가 있는 아이들을 부러워했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인형을 손에서 떼지 못했으며, 더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성적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아이는 그런 환경에 처한 것만이 아니었다.​

 

나는 또 하나의 시행착오를 범하고 있었다. 아들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엄격주의와 아울러 매의 훈도를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잔정을 표시하는 일이라고는 없었고, 웃는 얼굴에 칭찬보다는 엄한 얼굴에 꾸지람이 훨씬 많았고, 내 기준으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면 장딴지에 피멍이 들도록 매질을 하면서도 절대로 소리내어 울지를 못하게 했다.

 

나의 시행착오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함께 글을 쓰는 작업을 갖다 보니 언제나 내외간에 대화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인형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나는 소설이라는 긴 글을 쓰는 처지라서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나의 그런 시행착오가 객관적으로 지적되기 시작했다. 해마다 바뀌는 담임선생들의 공통된 지적은 아이를 너무 엄하고 무섭게 키우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아이가 학교생활에서도 얼마나 기죽고 겁먹고 있으면 그런 지적이 일치되었을 것인가.​

 

나는 아내의 근심스러운 일깨움으로, 아들이 무슨 일인가를 제 뜻으로 하려 하다가도 내가 묻기라도 하면 그냥 얼버무리며 얼른 제 뜻을 꺾고, 친구들과 무슨 약속을 했다가도 내가 한마디만 하면 당황해서 계획을 취소해 버리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는 내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타박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이었다. 나는 엄한 아버지가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들은 거의 말이 없는 아이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어머니한테 한마디 하더라는 것이다. 아빠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아무 관심도 없다고. 나는 그 말을 전해 듣고 암담해졌다. 나는 내 삶의 일부가 실패했다는 착잡함과 함께 나를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들의 말을 뒤집으면, 나는 아빠를 사랑하지 않으며 아무 관심도 없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이런 중간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엄격주의를 앞세우고 매의 훈도를 실천했던 것이 아니었다. 성인으로서의 일차 판단력을 형성할 수 있는 고등학교 1학년의 아들에게 나는 공포의 대상일 뿐 버려진 아버지였던 것이다. 나는 참담한 기분으로 아내와 의논한 끝에 아들과 단둘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소년기의 교육은 완전 실패로 돌리고, 청년기의 교육을 새로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건 끊어진 부자지간의 끈을 잇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여행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여행 계획을 말했을 때 아들은 전혀 반가워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는데, 그 얼굴은 어색하고도 떨떠름했다. 1989년 1월 중순, 나는 대하소설인 『태백산맥(太白山脈)』을 쓰느라고 일분일초가 아깝고 초조한 시간 중에서 사흘을 떼 내 속초로 여행길을 떠났다. 나를 따라나선 아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또, 아들은 이박삼일 동안 끌려다니며 무슨 소리를 듣게 되리라고 예상했을까.​

 

나는 아들이 예상하고 예측하고 상상하고 있을 언행은 단 하나도 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흘 동안 나는 공부에 대해서, 앞으로 진학에 대해서, 그리고 그 어떠한 훈계조의 말도 단 한마디 하지 않고 사흘을 보냈다. 차창 밖의 경치 이야기를 했고, 제일 값비싼 생선을 골라 회를 시켜 먹였고, 이틀 밤을 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골라 보였고, 텔레비전도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보게 했고, 겨울비가 오기에 일부러 우산을 한 개만 사서 등 감싸안고 받쳐주었고, 비바람 몰아치는 경포대 바다를 둘이 꼭 붙어 서서 삼십 분 정도 바라보았고, 호텔 커피숍에 마주 앉아 바다의 거친 파도와 경포 호수의 잔잔한 물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 이변이 일어났다. 대관령을 넘어오는데 멀미가 너무 심했으니 돌아갈 때는 다른 길로 갔으면 좋겠다는 아들의 의견이었다. 그전 같았으면 혼자 참아내고 말지 그런 말을 할 아들이 아니었다. 나는 무슨 보석이라도 얻은 듯 기쁘고 반가웠다. 그건 내가 잇고자 하는 끈이 이어졌음의 확인이었던 것이다.

 

나는 흔쾌하게 아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비 내리는 동해안 도로를 따라 대구로 내려와서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면 읽히려 했던 『태백산맥』에 ‘사랑하는 아들 도현이에게’ 라고 써서 주었다.

그 뒤로 아들은 제 어머니에게 여행의 사흘 동안을 몇 번이고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밤늦게까지 글을 쓰고 있으면 물잔이나 먹을 것을 가지고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몇 매나 썼는지 힐끗 보고 나가고는 하는 것이다. 그 묵직한 정 표시에 나는 가슴이 시리며 글 쓰는 고달픔도 잠시 잊고는 했다.

 

내가 『태백산맥(太白山脈)』을 다 마치고 4부의 앞에다 쓴 작가의 말에 굳이 ‘아들 도현이’라고 이름을 밝힌 것은 주책없이 아들을 자랑하자는 것이 아니라 긴 글 쓴다고 그 동안 저지른 나의 잘못을 사과하는 뜻인 동시에 내 사랑을 아들에게 확실히 나타내고자 함이었다.​

모든 청소년의 비행이 기성세대의 잘못이듯 모든 자식의 문제는 부모의 잘못임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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