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을 차리는 동안 / 장미숙

 

 

아침 8시에 온다던 혁이 7시 반에 도착했다. 고등어를 굽고 소고기미역국을 데웠다. 밥을 차리는 손이 자꾸 허둥댔다.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했는데 밥상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찬 한가지라도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몇 년 만인가. 혁을 위해 밥상을 차린 것이, 7년 동안 없었던 것 같다. 혁은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예전부터 그랬다. 반찬이 있든 없든 집에서 먹는 밥을 좋아했다.

아침을 먹고 우리는 주민센터로 향했다. 밖에는 늦여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막내아들은 형을 옆에 태워서인지 긴장한 듯 운전이 서툴렀다. 뜻밖의 조합, 셋이서 같은 공간에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 무엇보다도 혁이와 농담을 주고받을 줄은 몰랐다. 생각지도 않은 때 맞닥뜨린 한 사람의 죽음은 많은 걸 바꿔놓았다. 우리를 꽁꽁 묶었던 매듭이 어느 순간 확 풀렸다. 동시에 막혔던 길이 얼렸다. 얽힘은 단절이었지만 풀림은 소통으로 이어졌다.

긴 단절을 뒤로하고 우리가 다시 만난 건 대학병원 중환자실이었다. 혁이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나와 막내아들, 우리는 가족이지만 가족이 아닌 것처럼 지냈다. 그 세월이 7년이라는 시간 속에 담겼다. 며느리는 날 보자마자 아무 말 없이 다가와서 껴안았다. 나는 며느리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한마디도 없었지만, 서로의 마음을 읽었다. 혁은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았다. 훌쩍 커버린 손녀와 손자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혁은 일하다 말고 올라온 터라 더 초췌해 보였다. 한때 건장했던 혁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소심한 중학생 아이가 조심스럽게 날 바라보는 환상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을 처음 만난 날, 우리는 에버랜드에 갔을 것이다. 그때 혁은 부끄럼 많고 소심한 아이였다. 까불거리는 동생에 비해 조용했다. 서른도 되지 않은, 어리숙했던 내가 두 아이를 키울 자신감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아이들이 안 돼 보였다. 풀이 죽은 혁이, 말이 많은 둘째, 성격은 달랐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결핍을 나는 마주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둘째는 재잘거리며 내 옆에 따라붙었고 혁은 멀찍이 뒤떨어져서 마지못해 걸었다.

두 아이의 엄마 노릇을 자처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시 내게 희생정신이나 선한 마음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이 사는 집에 간 첫날, 화장실에 쌓인 빨래를 보았을 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빨래를 하기 시작한 건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이 작용해서였다. 여자 없는 집안의 무질서함이 견딜 수가 없었던 것도 같다. 어쩌면 혁의 그늘진 얼굴에 마음이 동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 엄마는 유방암으로 죽었다고 했다. 나 또한 남편을 간암으로 잃고 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외숙모의 소개로 만난 남편에게 나는 전혀 마음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이들 때문이었는지 나를 집요하게 붙잡았다. 그때부터 매듭은 꼬이기 시작했다. 남편에게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자 모질지 못한 성격을 운명이라고 합리화했다. 남편의 집착이 너무나 강했기에 기가 질린 것이기도 했다. 막내 아이가 생기고 난 뒤 내 삶은 더 다른 길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겉으로 말짱했던 남편은 직업도 가진 것도 변변찮았다. 가장 큰 문제는 술을 마시면 딴사람이 된다는 것이었다. 두 아이는 날 의지하고 따랐다. 세 아이 뒷바라지가 쉽진 않았지만, 가끔은 아이들이 오히려 힘이 되었다. 혁이는 생활력이 강해서 중학생 때부터 신문 배달을 했다. 남편은 집안 사정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점점 내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하루하루 두려움은 그 크기를 더해갔다. 벗어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끝내는 다시 집에 돌아오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혁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다. 일 년간 나는 젊은 할머니가 되어 손녀를 돌봤다. 혁은 키워준 정을 아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남편보다 늘 내 편을 들며 불행에 몸부림치는 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해결방법이 없었다. 와중에 둘째가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몇 년 뒤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누워지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혁이와 나는 남편의 뒷바라지에 매달렸다. 경제력이 없었던 남편이 미래를 대비했을 리 만무했다. 재활병원의 한 달 병원비는 수백만 원이었다. 피가 마르는 날들의 시작이었다. 병원비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간병인들은 남편의 비위를 맞추지 못했다. 아니, 세상에 그의 비위를 맞출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불안과 초조의 날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혁이와 나는 점점 지쳤고 왕래가 끊어졌다. 두어 번 밖에서 밥을 먹은 게 전부였다. 피폐해지는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웠기에 만남을 피했다. 할 말 외에는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갔다. 서로의 집을 오가는 일도 없었다. 혁이는 병원비를 벌기 위해 지방을 돌며 노동을 이어갔고 가장이 되어버린 나도 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 막막함 속에서도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서로를 의지했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짐 앞에서 고통을 나누는 건 한없이 절실했다. 각자 짊어질 만큼의 짐을 나누며 버텼다.

하지만 우리는 마침내 임계점에 도달했다. 그러던 중 막내아들이 전역했다. 그리고 혁이와 나를 대신해 남편을 챙겼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남편의 몸은 점점 병이 늘어갔고 괴로움을 호소했다. 그 괴로움마저도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신장결석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한 날, 그의 모습을 보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보는 것조차도 괴로웠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잡아준 것 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살아있는 모습을 본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수술을 마친 다음 날, 그는 패혈증에 의한 심정지로 숨을 거두었다. 숨을 멈춘 그의 얼굴이 생전의 모습보다 평화로운 것에 안도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어갈 순간에 그는 생을 마감했다. 그토록 풀기 어려운 매듭이 스르르 풀린 것이었다.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우리는 각자 슬픔을 삼켰고 각자 울었으며 스스로를 위무했다. 말이 필요 없었다. 잘 견뎌준 것이 고마웠고 의지가 되어준 것에 감사했다. 자신의 고통을 상대방에게 옮기지 않으려 애썼다. 그것만이 그나마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간신히 이어진 줄을 놓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썼다. 혁의 변해버린 얼굴이 그걸 말해주었다. 최선을 다했다는 걸 혁은 몸으로 보여주었다.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 사람의 생을 정리하기 위해 관공서를 돌아다니는 동안 우리는 지난날을 들추지 않았다. 충분히 아팠고, 충분히 고통스러웠으므로 되새길 필요가 없었다. 혁은 말했다. “아버지처럼만 살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막내아들이 말했다. “형처럼만 살 수 있다면 좋겠어. 그렇게 살고 싶어”

혁이 다시 오면 좀 더 무거운 밥상을 차려야겠다고, 그리고 며느리의 조용히 웃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 나는 생각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좋은 수필 』202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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