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박자 / 최아란
소주 한 병을 잔에 따르면 딱 일곱 잔이 나온다던가. 둘이서든 셋이서든 공평하게 나눌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건배하고 일어서려 해도 누군가의 잔이 비었으니 또 한 병 시킬 수밖에. 이토록 술꾼들의 의리가 밤새 돈독해진다.
혼자 마시는 소주 반 병 맛을 아는 나도 이 딱 한 잔 때문에 감질나는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다고 더 마셔버리면 다음번의 즐거움이 모자라게 되고, 후일을 도모하는 설렘마저 줄어들게 되므로 아쉬울 때 멈추는 게 현명하다. 밀고 당기는 연애를 떠올려보라. 내일 다시 만나자며 오늘 밤 헤어져 밤새 수화기를 놓지 못하는 그 애간장을. 그렇다고 온종일 함께 붙어살게 되면 세상을 물들이던 핑크빛과 귓가 새들의 노랫소리는 금세 사라지고 만다.
이 애 끓이는 감질맛을 음악으로 구현한 것이 재즈라고, 나는 생각한다.
앞 박자에 힘주어 쿵짝 쿵짝 박수를 쳐보자. 그러니까 ‘쿵’에 강세가 있어서 박수도 쿵에 친다. 쿵! 짝, 쿵! 짝. 첫발을 힘차게 내딛고 다음 발이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모양새다. 패기 넘치는 군인들의 행진 같다. 씩씩하고 정연하여 군더더기가 없다. 이번에는 반대로 앞부분에서 우물거리다가 뒷 박자가 끝나기 전 힘을 실어본다. 음~ 짝! 음~ 짝! 힘겹게 걸음은 떼었으나 비척비척 넘어지려는 찰나 다음 발을 디뎌 겨우 균형을 잡는 모양새다. 한 발 밀려갔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뒷발이 무게를 받아내는 것이다.
재즈는 이런 엇박의 음악이다. 기세 좋게 전진해 가는 행진곡이나 여리여리한 세 걸음이 종종 달라붙는 왈츠곡과도 다르다. 어디로 가나, 어떻게 가나, 뜻하잖게 생에 놓여진 몸뚱이를, 그러나 결코 쓰러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밀어내는 음악. 기세 좋게 쓸고 가는 게 아니라 깡으로 한 발씩 버티며 가는 패기가 눈물겹다. 흐려지고 스러지는 한 박자 반의 무너짐에 마음 졸이다가 아슬아슬 직전에 끼어든 반박으로 다시금 중심이 잡힌다.
아마 그 밤중에 아버지들 걸음걸이가 꼭 저랬을 것이다. 시원찮은 안주와 찬술로 데운 몸을 골목 저쪽에서부터 대문까지 끌고 오던 걸음. 어슷하게 닳은 구두 굽이 박자를 끌고 쪼개며 엇박자를 낸다. 결코 쓰러지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검질긴 리듬이 출렁출렁 가로등 조명 속에 펼쳐진다. 박달재 넘는 우리 님이나 콩밭 매는 아낙네의 부축을 좀 받기도 하면서 말이다.
재즈가 빈민가 흑인의 음악, 남루한 노동자의 음악이었던 탓에 이런 감상이 드는 까닭도 있으리라. 약 대신 잔술로 고단함과 서러움을 달래던 그들 없이 과연 재즈가 이만큼이나 발전할 수 있었을까. 재즈의 아버지가 마일스 데이비스인지 찰리 파커인지는 모르겠지만 술과 음악을 함께 팔았던 알카포네 없이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으슥한 지하 술집에서 싸구려 밀주를 팔고, 가난한 빅밴드 연주자들을 고용해 밥값을 쥐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맨해튼 고급 칵테일 바부터 동네 문화센터 소극장에까지 재즈가 울려 퍼지는 일은 요원했을지 모른다.
아이와 재즈 연주회장에 갔다. 공연 티켓이 생길 때마다 오케스트라며 오페라며 데려고 다녔지만 이번처럼 신나 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뒷박 엇박의 개념을 몸으로 깨쳤는지 손뼉도 치고 허벅지도 두드리며 리듬을 탄다. 데이트 할 때 갔던 재즈바에서 맘껏 몸 흔들지 못했던 내 팔다리도 흥겹다. 넘어지지 않으려 다음 발을 아슬아슬 딛으며 자라준 어여쁜 아이와 모든 애 끓임을 박자 놓치지 않고 이어 붙여 온 내가 함께 하는 협주다.
함께 한 사람들 모두 음~ 짝! 음~ 짝! 놓치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는다. 무너질라 끊길라 애간장 쓰여 이어질 다음 단락이 궁금하다. 그런대로 리듬에 익숙해질 즈음 변주가 일어나고, 한마음 하모니를 이뤘나 싶으면 즉흥 독주가 펼쳐진다. 트럼펫 연주자의 날숨이 길어지니 관객들의 숨까지 멎어 감탄의 시위가 팽팽해진다. 허술하게 숭덩숭덩 비어진 박자 구멍에 꼿꼿하던 허리가 뭉개지고 어깨가 늘어진다. 새침한 모서리들이 얼크러져 울퉁불퉁 헐렁 덜렁 보기 좋게 엉긴다.
소주 반 병 마냥 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