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주머니 / 허정진

 

“주머니에서 손 빼라!”

타고난 습관처럼 어린 시절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녔고, 전략적 훈육처럼 아버지는 눈에 띌 때마다 그렇게 부지런하게 타일렀다. 남들처럼 힘차게 손을 휘저으며 씩씩하게 걷거나, 무슨 일이든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는 들찬 사내이기를 바랬는데 구부정하게 어깨를 움츠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팔짱을 낀 채 뒤로 한 발 물러서 있는 모습이 걱정스럽고 못마땅했던 것 같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넣을 것 없어/걱정이던/호주머니는//겨울만 되면/주먹 두 개 갑북갑북’윤동주 시인의 <호주머니>처럼 겨울철 얼어붙은 손의 따뜻한 보금자리였다면 다행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삼복의 한여름철에도, 바삐 걷는 걸음에도, 한 손에 물건을 든 상태에서도,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고집스럽게 한결같았다. 자승자박처럼 스스로 손이 자유롭지 못했던 셈이다.

멋져 보여서도, 반항적 기질에서 나온 불량한 행동도 아니었다. 세상을 거들먹거리거나 상대를 비아냥하는 태도는 더더욱 아니었다. 친구에게 따돌림당하거나, 충격을 받을만한 사건이나 사고도 없었다. 혼자 놀기 좋아하고, 번잡하고 떠들썩한 것보다는 적막과 침묵을 선호하는 성향은 사실이었다. 달콤한 고독, 외로움과 쓸쓸함을 쫓아가느라 허공의 손을 둘 데가 없어 주머니 속으로 감추었는지도 모른다.

난감한 경우가 많았다. 군인 신분일 때는 자세 불량이었고, 직장 상사 앞에서는 사람이 불성실해 보였다. 남들 눈에 불편한 모습이거나 품위 없는 행동인 것은 분명했다. 빙판에 넘어져 그대로 코방아를 찢을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습관을 고치겠다고 호주머니를 아예 바늘 몇 뜸으로 꿰어도 보았지만 그래봐야 뒷짐을 지고 다니는 차선책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주머니를 없앨 수도 없었다. 열쇠나 손수건 같은 소지품이나, 동전이나 지폐를 보관하는 지갑 역할도 필요했다.

사람의 몸에서 손만큼 중요한 역할을 가진 존재도 없다. 신체적 기능뿐 아니라 사회적 또는 심리적으로도 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손으로 반가움의 악수도 하고, “화이팅”을 외치며 두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고, 슬픈 일을 당한 사람에게 등을 쓰다듬어 위로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세상을 떠날 때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이 손을 끌어당겨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을 느끼는 일이다. 그 따뜻해야 할 손이 주머니 속에서 혼자 빈둥거리고 있었다.

세상 앞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낯섦과 두려움이 있었다. 다른 방향에서 온 이방인처럼 분명 이해하기 힘든 서로 간에 삶의 방식이 있었다. 내가 믿고 있는 진심을 포기하기도, 새롭게 다가오는 사실들을 쉽게 인정하고 수용하기도 힘들었다. 차이와 다름은 어쩌면 이해와 조화를 이룰 수도 있는 경계인데도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 이질감부터 앞서서 뒷걸음치게 했다.

시인이 되고 목사가 되고 싶다는 어릴 적 꿈이나, 세상을 순정과 낭만과 의리로 해석하고 추구했던 삶이나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그 상실과 위축감에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몇 겹이나 안으로만 숨어들었다. 점점 말수는 적어지고 앞자리나 중앙, 시선의 중심이 되는 곳은 피하기 시작했다. 아웃사이더가 편해진 손은 자꾸 다락방 같은 바지 주머니를 찾았다.

삶의 결에 포만감이 없었고, 살아가는 세상은 안정감이 없었다. 위협적인 호객행위에 주눅 먼저 드는 사람처럼 긴장과 대립, 조그만 변화와 충격에도 불안감에 시달리는 공황장애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불편하고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욕망과 결핍의 간극에서 오는 무력감과 소외감은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보다는 최소한의 생존 영역 내에서 안주하려고만 들었다. 남을 의식하고 경계하는 버릇, 바지 주머니는 요나 콤플렉스처럼 안온과 평화를 위한 피신처이자 탈출구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자발적 유폐였다. 낯설다는 핑계로 보이지 않는 내 그림자 뒤로 숨기 시작했다. 동참보다는 관망을 택하고, 포기는 아니었지만 기회를 노렸다. 나를 감추고 속이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남들이 몰랐으면 했다. 애써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외면이나 응축, 필요하다면 그때야 주인공이 되지 못한 아쉬움을 감추며 세상을 향해 볼멘소리를 내뱉곤 했다.

그 호주머니 속에서 나의 자존과 긍지, 위엄, 욕망, 체면, 가치, 의미 같은 존재의 알갱이들이 옹송그렸다. 때로는 분노와 울분의 화염이 부글거리기도 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는 일이 김장독처럼 자신을 숙성하는 과정이기라도 했다면, “꿈틀”하고 튀어나오려는 욕망을 잠재우는 순간의 여유이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오히려 무슨 일이든 쉽게 타협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완고한 고집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손은 세상 앞에 먼저 나서는 법이 없었다. 밥 한 끼 먹자고 친구에게 먼저 전화 한번 한 적 없고, 누군가의 아픔을 미리 알아차리고 늘품 있는 눈길 한번 준 적도 없었다. 때로는 양팔을 벌려 막아설 줄도 알아야 하는데 나를 떠나가겠다는 사람은 그냥 가게 내버려 두고, 때로는 악의 없는 거짓말에 속아주기도 해야 하는데 우는 사람 울고 싶은 이유가 있겠지 싶어 멀뚱하게 그냥 보고만 있었다. 남에게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에도 인색했다.

이제 나이가 들고서야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는다. 자기 삶에 당당해졌다거나 세상일에 상냥하거나 너그러워졌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아직도 자신을 감추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자기의 시간, 내가 추구하는 가치대로 자신만의 만족과 행복감에 충실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더 이상 욕심낼 일도 없고, 주인공이 되지 못해 더 이상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자존심 대신 자존감, 동안보다 동심을 찾은 덕분이다.

“손을 잡아주세요.”가 유니세프의 슬로건이다.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야 남의 손도, 남이 내 손도 잡을 수 있다. 선의와 봉사로 사는 사람들은 주머니가 없는 바지를 입는다는 말도 있다. 주머니에서 꺼낸 손으로 나무도 심고, 담장 너머로 손도 흔들고, 집 앞 6차선 건널목을 횡단하는 동네 노인들 위험하지 않게 손도 좀 붙들고 건너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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