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그(langue)의 종착지 / 신재기

 

 

습사무소 -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다. 아마 초등학교 2,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수업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나에게 그날 배울 단원을 읽어 보라고 했다. 나는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다. 다른 사람 앞에 잘 나서지 못했다. 선생님으로부터 지목을 받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단원 제목이었던 ‘읍사무소’를 ‘습사무소’로 읽고 말았다. 당시 대부분의 시골 아이들에게 학교 공부는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드는 일보다 차순위였다. 2, 3년이나 학교에 다녔는데도 읽기나 받아쓰기를 제대로 하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열 살 전후의 어린아이가 큰 소를 몰고 다니는 일에는 능숙했으나 문자 앞에서는 갈팡질팡했다. 뭔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오는 가운데 ‘읍’을 ‘습’으로 오독했던 것이다. 당시 저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하였읍니다, 먹었읍니다, 보았읍니다’ 따위를 ‘하엿슴니다, 먹엇슴니다, 보앗슴니다’로 읽다 보니 ‘읍’을 ‘습’으로 읽어야 하는 줄로 알았다. 그리고 ‘읍’으로 시작하는 단어는 교과서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면사무소’는 학교 옆에 있어 익숙했지만, ‘읍사무소’는 듣도 보도 못했다. 선생님이 핀잔을 주면서 ‘읍사무소’로 읽도록 정정해주었을 때, 나는 책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아이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는 것을 보면 그 상황에서 나는 매우 창피스러웠던 모양이다. 그 후에도 ‘읍’과 ‘습’이란 글자는 뒤엉켜 혼선을 빚으면서 오랫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

 

연음법칙 - 중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은 여러 가지 국어 문법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어떤 내용은 중학교 1학년 수준을 넘어서기도 했다. 가장 먼저 접한 것이 ‘연음법칙, 자음접변, 구개음화’ 등과 같은 음운론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연음법칙’을 접했을 때 묵은 체증이 단숨에 내려가는 것 같았다. 경계를 구획하지 못하고 희미한 안갯속에 있던 ‘습과 읍’이 마침내 자기 모습을 가진 고유한 실체로 다가왔다. 여기에다 ‘절음법칙’까지 이해하면서 우리말 문법이 마치 마법같이 느껴졌다. 나는 지금도 ‘맛있다’를 ‘마딛따’로 발음하면서 원칙을 고수한다. 식사 때 우리 아이들이 ‘마싣따’로 발음하지 않는 나를 의아해한다. 한번은 중학교 때 배운 연음법칙과 절음법칙을 아이들에게 진지하게 설명한 적도 있었다. 지금 ‘마딛따’를 원칙으로 하고 ‘마싣따’를 허용하는데, 이는 절음법칙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연음’과 ‘절음’에 대한 이해는 내 이름의 로마자 표기에까지 이어졌다. 이름 한 자 한 자는 제각기 뜻을 지닌 실사實辭로 간주하고 절음법칙을 적용했다. ‘Shin Jae gi’가 아니라 ‘Shin Chae ki’로 적었다. 전자는 연음을 전제한 유성음 표기이고, 후자는 절음을 전제한 무성음 표기다. 이 표기가 틀렸다고 지적한 사람도 있었다. 내막을 모르니 ‘채키’로 읽힐 수 있는 것을 오류라고 볼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린 나이에 ‘읍사무소’를 ‘습사무소’로 잘못 읽어 창피를 당했던 그때의 트라우마가 국어 문법에 집착하는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콩탕풀칠 -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국어 외 문법 과목을 따로 공부하게 되었다. 그때 문법을 가르친 분은 교내에서 엄하기로 소문난, 연세가 지긋한 교련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대구 소재 대학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장교로 장기 복무하다가 전역 후 우리 학교 교련 교사로 부임해 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선생님은 대학 시절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였고, 특히 최현배 국어문법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달통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교과서는 밀쳐놓고 최현배의 국어 문법을 요약 정리하여 유인물로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수업 시간에 설명은 간단하게 하고 무조건 암기하도록 강제했다. 재미있는 조어를 통해 쉽게 암기하는 방법까지 제시해 주었다. 가령 ‘ㅎ’ 소리를 포함하는 거센소리(격음) ‘ㅊ, ㅋ, ㅌ, ㅍ’은 ‘콩탕풀칠’로, 치음(齒音) ‘ㅅ, ㅈ, ㅊ’은 ‘새잔치’로 대치하는 등이 그것이었다. 대부분의 학생에게 국어 문법은 재미없고 어려웠다. 그런데 나는 갈수록 대학입시와 별로 상관없다는 점을 잊어버린 채 문법 공부에 빠져들었다. 모음 삼각도, 다양한 음운 법칙, 아홉 품사, 일곱 가지 문장 성분, 조사의 종류, 불완전 명사, 조사의 붙여쓰기 등의 주요 국어 문법을 두루 섭렵했다. 어쨌든 별난 한 선생님의 문법 교육은 나의 대학 본고사 합격에도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고, 내가 국어에 관한 기초지식을 오래 유지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다만 지적 충격에 매료되어 15세기 문법인 이영보래(以影補來)와 같은 고등학생 수준 밖에 있는 학술적인 문제에 매달려 에너지를 낭비했던 일은 지적 과잉이 빚은 폐해가 아닐 수 없었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 대학의 국어국문학과 교과목은 일반적으로 국어학과 국문학이 반반으로 나누어 개설된다. 그런데 내가 다닌 대학의 경우에는 국어학 관련 과목이 훨씬 많았다. 국어학 전공 교수가 더 많았던 탓이었다. 2학년 때부터 현대문학을 전공하겠다고 진로를 정한 터라 국어학보다는 국문학 공부에 관심을 더 쏟았으나 어쩔 수 없이 여러 국어학 과목을 이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관심은 국문학에 두었으나 학과 성적은 국어학 쪽이 월등하게 좋았다. 내 무의식 속에는 국어학에 대한 지적 매력이 잠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학 학부 과정에서 공부를 통해 얻은 몇 가지 언어학 관련 개념은 나의 학문연구와 글쓰기에 밑거름이 되었다. 언어 사용의 경제원칙은 언어 변화를 넓게 이해하는 시야를 열어 주었다. 어느 교수의 변형 생성음운론 강의에서 처음 접한 ‘변별적 자질’이라는 개념은 문학작품을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내 지식의 장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소쉬르의 언어학 기초이론에 대한 이해였다. 랑그와 파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언어의 자의성 등은 지금도 여전히 내 지적 세계를 작동하는 주요 요소다. 시론 수업을 통해 알게 된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는 명제는 오늘 나의 문학관과 수필이론을 지탱하는 밑절미로 자리하고 있다. 일반 언어학이나 국어학을 따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대학 학부 과정에서 내 안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었던 몇몇 언어학 개념은 보석같이 소중한 것들이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 문학 공부를 이어오는 과정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인식 이상으로 언어가 존재의 진실을 훼손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는 생각도 빈발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를 어느 정도 이해했을 때, 문학에서 오독이 한계이면서 본질이라는 다치적 관점을 수용했을 때, 글쓰기를 하면서 가용할 언어의 한계에 직면했을 때, 언어는 가능의 빛이기보다는 불가능의 어둠이었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 ‘기표(시니피앙)에 미끄러지는 기의(시니피에)’라는 라캉의 설명이 내 언어 인식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언어는 진실과 본질의 언저리에서 변죽만 울리고 끝나거나, 아니면 평정(平靜)과 무심의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킨다. 내가 뱉는 언어가 부족하지 않으면 넘쳐 과녁을 빗나가는 것은 글쓰기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반복된다. 시인 이성복이 “애초에 글쓰기는 제 눈을 찔러 홍채를 살피려거나 제 살을 파먹고 기운을 회복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라고 했는데, 이는 바로 언어의 불완전성을 지목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 말이 누구의 가슴에도 닿지 못한 채 허공의 메아리로 흩어지고 마는 것을 인생 노년에 이르면서 더욱더 실감한다. 언어에 관한 내 생각이 진화해온 종착지는 ‘불립문자’인 것 같다. 언어에 휘둘려 감정과 욕망을 소비하는 가련한 모습이 지금 나의 자화상이다. 너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말, 힘만 잔뜩 들어가 침소봉대하는 오만한 언어, 진리의 변죽만 울리고 마는 허식의 글들, 타인의 생각을 따라다니기에 분주한 문장…. 나는 여전히 ‘읍사무소를’를 ‘습사무소’로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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