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베고 눕다 / 지영미
하루를 마감하고 자리에 누웠다. 자정이 넘은 시각,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바퀴의 마찰음과 질주하는 오토바이의 요란한 소리에 간담이 서늘하다. 벽간과 층과 층 사이, 창밖의 뒤섞인 소음들이 도시의 불빛만큼이나 쉬이 잦아들지 않는다. 사각사각…, 일상의 흥분을 채 멈추지 못한 타인의 소리가 벽을 타고 전해진다. 문명의 기계음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늦은 밤을 차지한 지 오래다.
바깥의 소음들이 잦아드는가 싶으면 내면의 소음이 나를 괴롭혔다. 누군가의 말에 움찔했던 순간과 혹은 내가 주었을지도 모를 상처들을 곰곰이 떠올렸다. 사람과의 틈바구니에서 끊임없이 남과 나를 비교하며 줄다리기를 했다. 번잡한 삶이 만들어내는 얽히고설키는 관계의 소음과 불협화음에 점점 지쳐갔다.
일상이라는 그물에 갇혀 옴삭 달싹 못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눈빛에 생기는 사라지고 내면의 촉촉함도 잃어버렸다. 그때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고즈넉하고 조용한 공간이었다. 무엇을 피해 멀어진다는 것이 자칫 패배로 느껴질까 봐 두려웠다.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면 다른 것들이 채워질 것이라고 되뇌며, 나는 그렇게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떼었다.
언덕배기 녹색 풍광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산이 두른 순후 淳厚한 집 자리가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햇빛이 황토색 바닥에 쏟아지고, 초록빛을 뿜어내는 우듬지가 출렁거렸다. 막자란 과실나무에서는 오종종한 열매가 단 냄새를 풍겼다. 들꽃은 보랏빛 깨알 같은 꽃을 피우고 그 사이로 벌과 나비가 쉼 없이 들락거렸다.
한 폭의 풍경화 속에 보금자리를 틀고 단잠을 꿈꾸었다. 하지만 우리만 사는 마당 넓은 집에서 한동안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안달할수록 잠은 더 멀리 도망가고 나를 에워싸는 것은 정적뿐이었다. 고요함이 그렇게도 그리웠는데, 적막도 어둠처럼 깊이가 있어 도리어 무섭게 느껴졌다. 바람이라도 불면 뒷마당 감나무의 서걱거리는 소리도 거슬렸다. 도시에서 나를 괴롭히던 소음인 듯하고 나를 몸서리치게 하던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로 들렸다.
문득 어느 날 부드러운 바람, 시원한 빗줄기에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도시의 소음을 벗어나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백색 소리가 귓가에 모여들었다. 귀를 타고 들어와 파문을 일으키면 어느새 마음에는 시냇물이 흘렀다. 꽁꽁 언 얼음 사이로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면 홍매화가 기지개를 켜고, 여름 내내 귀를 따갑게 하던 매미 울음이 잦아들면 귀뚜라미가 날개를 펼치고 스르륵거렸다. 빈 들녘에 침묵이 흐르면 겨울을 향해 내달리는 나뭇가지가 바람의 무게를 참지 못하고 투드득 떨어졌다. 자연의 세계는 순리에 따라 순환의 고리를 돌리고 나는 점점 그들에게 스며들었다.
맷 비둘기 한 쌍이 구구거리며 새벽을 깨우면, 탈탈탈탈 경운기가 다가오다가 점점 멀어진다. 이내 들판에 참새 떼가 일제히 날아오른다.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이장님의 투박한 목소리가 어눌해서 정겹다. 바람이 흔들어 대는 창가에서는, 왕풍뎅이가 날개를 퍼르륵 거린다. 다양한 소리가 갈마들며 조화롭게 화음을 만들어간다. 그 속에서 나는 온갖 고민을 끌어안고 사느라 궁핍했던 마음을 치유하고 있었다.
여름 소나기가 나뭇잎을 후드득 훑고 지나가는 소리, 먹이를 달라며 조르는 새끼 새들의 지저귐, 새끼를 보낸 어미 소의 울음소리, 숲에서 만나는 바람 소리에서 무한한 자연의 정취와 생명체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며 근원적인 모습으로 돌아간 나를 돌아본다. 나에게로 오는 소리는 이곳에 나 외에도 다른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내가 충분히 손짓하면 그들도 나를 깊숙이 받아 준다. 함께 존재하며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숲의 소리는 긴 여운을 남긴다.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어린 시절의 교정과 친구들, 가슴 저렸던 이별, 한때 마음을 달구었던 열정을 떠올리며 미소가 피어난다. 어느새 울퉁불퉁했던 마음이 매끄럽고 촉촉한 풀잎처럼 나긋해진다. 어스름 저녁, 도시의 부산스러운 발길에서 느꼈던, 왠지 모를 불안감과 외로움은 사라지고 나만의 은밀한 장소에서 깊은 고독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꽁지를 달구는 반딧불이의 반짝거림을 쫓다 보면 밤은 천천히 흘러간다.
숲에서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앉은 느낌이 밀려온다. 뒷산에서 낙하하는 물소리에서 엄마의 심장 소리를. 졸졸 흐르는 개울가에서 혈관을 타고 혈액이 이동하는 소리를 듣는다. 햇빛과 바람과 비가 키우는 대지의 식물 속에서 탯줄을 통해 양분이 전달되는 모성의 신비함이 느껴진다.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 대신 빗소리가 귀를 타고 흘러든다. 편을 갈라 끊임없이 서로를 비방하던 관계의 소음 대신 수런거리는 나뭇잎 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적막한 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소리를 품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기에 저렇게 속삭이는 것일까. 나지막이 귀를 기울여 미지의 음을 모은다. 나뭇가지가 바람을 타고 흐느적거리면, 어디선가 산새의 울음이 고요한 숲을 깨운다. 그 소리가 잦아들면 이내 풀벌레가 날개를 비비며 화음을 넣는다. 나 여기 있어요. 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잠든 줄 알았던 밤의 창밖은 생명체들의 어우러지는 소리로 그득하다.
깊은 밤이 되면 소리는 잦아든다. 인간의 안일을 위해 택한 자연을 휴식하도록 해야 한다. 다음 날을 위해 자정하는 시간, 내가 고요한 휴식처를 찾아 이리로 왔듯, 소음을 내지 않기로 한다. 나무와 풀, 숱한 생명체들이 내는 미분음 微分音 속에서 더 넓어지고 여물어지는 나를 만난다.
고즈넉한 이 밤, 나는 자연이 빚어내는 소리를 베고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