눕는다 / 김은주  

저만치 지슬할매 걸어가신다. 양파 밭을 지나 기와집 골목으로 타박타박, 평소와 달리 통 기운이 없어 보인다. 뒷집 진 손에는 마을회관에서 어버이날이라고 받은 비닐봉지가 굵은 손마디에 칭칭 감겨 있다. 행여 떨어뜨릴라 야무지게 쥐고 봄볕을 가르며 집으로 간다.

투명한 비닐 속에는 쑥 절편, 둥그런 팥빵, 달달한 야쿠르트가 담겨 굽은 할머니 허리 뒤에서 좌우로 흔들거리고 있다. 훤히 내비치는 비닐 속처럼 등 돌리고 걸어가는 지슬할매의 쓸쓸한 마음이 말하지 않아도 이만치에 있는 내 눈에는 다 보인다. 이심 아니면 전심이다.

자식들이 제비 새끼처럼 집을 찾은 할머니들이야 손자 꽃 쳐다보느라 경로당엔들 나왔을까? 그저 아무도 찾지 않아 빈 둥지가 서글픈 할머니들이나 오늘 같은 날 마을회관에 나왔을 것이다.

강냉이 수염처럼 가는 머리를 뱅뱅 틀어 올리고 여태 비녀를 고집하는 지슬할매는 반쯤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쓸어올리며 골목으로 접어든다. 비녀 아래 똬리 튼 머리카락은 은회색이다.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두툼한 자주 고쟁이에 위에는 푸른 적삼을 입었다. 적삼 색깔은 봄인데 고쟁이나 신발은 아직 겨울이다.

대처에 나간 자식은 눈앞의 제 밥숟가락 걱정에 노모를 잊기 일쑤다. 언제 어느 때라도 고향을 찾으면 날 반기리라는 마음 때문에 부모는 늘 급한 일 다음으로 밀려난다. 기와집 골목을 돌아서더니 총총 지슬할매 사라져간다.

올해부터 나는 어버이날이 되어도 갈 곳이 없어졌다. 지난해 어머니를 잃고 생사 구분이 잘 안된 상태로 일 년을 보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갈 곳이 없어지니 비로소 어머니가 돌아가셨나 보다 여겨진다. 더는 공경할 대상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어른이 된다는 말을 요즘 나는 자주 곱씹는다.

효소를 거르다 말고 잠시 마루에 앉는다. 체반에 효소 건더기를 겹겹이 쌓아놓고 그 물이 다 빠지기를 기다린다. 쳇다리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일정한 간격의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물이 새는 지슬할매 부엌이 생각나고 연이어 수세미가 떠오른다. 나달나달 떨어져 밥풀이 몇 개 낀 낡은 수세미.

벌떡 일어나 생필품 찬장을 연다. 시골 살며 생긴 버릇 중의 하나가 물건을 쟁여 놓고 쓰는 것이다. 비누며 치약, ​세제와 수세미를 시장바구니에 담는다. 기와집 골목을 다 돌아 할머니 집 앞에 왔는데도 기척이 없다. 생 막걸리도 한 병 챙겨 왔더니 무겁다. 봄볕만 가득한 툇마루에 시장바구니를 두고 다시 뒤란으로 가본다. 빈 맷돌 위에 감나무 그림자만 어롱댈 뿐 거기에도 지슬할매는 없다.

다시 바구니를 들고나와 서원 앞 양파 밭으로 가니 앙파 이랑 사이에 쪼그라진 모과처럼 지슬할매 엎드려 있다. 잡초를 캐 등 뒤로 던지는 솜씨가 아직은 젊은 사람 못지않다.

"아이고 별난 기라, 오늘 같은 날은 시원한 툇마루에서 폭 좀 쉬어야 제. 죽자 사자 해서 뭐 할라요." 소리치니 너 올 줄 알았다는 모습으로 환하게 웃으신다.

종종걸음으로 이랑을 따라 할머니 등 뒤에 서니 내 긴 그림자가 할머니 등을 덮는다.

"그래 그러고 잠시 있어라. 그것도 그늘이라고 시원타."

겨우내 비닐에 쌓인 양파 모종을 아기 돌보듯 하시더니 봄날 내내 그 푸른 기세가 창창하기 그지없었다. 지슬할매 손길을 먹고 자란 양파는 하늘을 찌를 듯이 푸른 잎을 쏘아 올리더니 오월이 되자 어느새 하나 둘 옆으로 눕기 시작했다.

잎이 창창할 때는 양파가 땅에 제 몸을 숨기고 있더니 위 대궁이 쓰러지고 나니 하얀 속살을 땅 위로 쑥 밀어 올린다. 동그란 몸이 반은 땅 위로 반은 흙에 묻혀 있다. 볕에 드러난 통통한 양파 속살이 혼자 보기에 아깝다.

"양파 대궁은 물이 부족해서 그렇습니꺼. 와 이래 땅에 누웠어예."

"대궁 안에 힘을 뿌리로 다 쏟았으니 저도 기진해서 누웠나 보다. 저래 팍팍 자빠지면 양파가 알이 다 찼다는 증거다."

절묘한 자연의 이치를 들으며 들판을 둘러보니 참 희한하게도 양파 밭, 반 이상이 이미 쓰러져 누웠다. 간간이 꼿꼿하게 선 양파가 더러 보이기는 해도 들판 전체가 누운 양파다.

"저기 꼿꼿이 선 양파는 아직 알이 덜 찼나 보네예."

"씨 매달고 폼 잡고 서 있는 것은 다 수 양파다. 곧 죽어도 저는 수놈이라고 저래 고고 창창 견디는 거라. 모양새도 길쭉한 것이 암팡진 암놈만은 못하제."

목축이고 일하라는 채근에 못 이겨 지슬할매 논두렁으로 나오신다. 엉덩이로 지그시 누르고 앉은 풀이 할머니 고쟁이에 풀물을 들였다. 생 막걸리 한 잔 그릇에 붓는다. 밭 매며 목이 말랐던지 술잔을 받는 와중에 벌써 마른 입맛을 훔치신다. 단번에 쭉 마시고 다시 내민 빈 그릇에 봄볕이 소복하다. 안주 없이 한 잔을 더 비우고 나서야 그릇을 내려놓으신다.

짭짤한 열무 한 젓가락 입에 넣고 씹는 동안 눈길은 멀리 서원 뒷산에 가 있다. 옴푹 파인 할머니 볼이 오래 열무를 씹는다.

"얼추 나도 할 일 다 했으니 선산에 가서 누워야제. 눕는 날이 잔칫날이여."

눕는 일이야말로 할머니께 남은 마지막 중한 일인 양 말씀하신다. 이제 다 떠나고 할머니 곁에 남은 것이라고는 텃밭과 선산뿐이다. 밭과 산을 어루만지며 내 누울 자리를 살피는 것이 저승갈 때의 남은 일거리로 보인다.

"죽으면 썩어질 몸 살았으니 부지런히 움직여야제."

오리 몇 마리 식솔을 데리고 나와 볕을 ​쬐고 있다. 해가 한나절이나 지났으니 오리들도 개울에서 놀 만큼 놀았나 보다. 고개를 위로 꼬고 조는 놈도 더러 있고 털 고르기에 바쁜 녀석도 있다. 서로 몸 비비며 누운 모습이 편해 보인다. 그런데 지슬할매 호미로 훠이훠이 오리를 쫓는다. 잠깐의 평화가 꺠어지자 오리들 우르르 개울로 몰려간다. 남은 막걸리 들고 여물대로 여문 양파 이랑을 따라 지슬할매 밭 매러 가신다. 그 뒤로 겹겹이 누운 양파가 튼튼하게 호위護衛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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