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 한 계절을 보냈다/김영화

 

수 십개의 홍시가 나란히 줄 서있다. 방바닥에 깔아 놓은 신문지 위에서 내 주먹 만한 것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몇 일전에 정읍에 사는 동생이 자기네  마당에서 딴 홍시감 한 박스를 서울, 내가 묵을 막내 동생네로 보냈다. 서리맞아 가며 나무가지에서 익을대로 익은 것이다. 막내동생은 이렇게 달고 맛있는 감은 없다며 붉게 익어가는 홍시 칭찬에 침이 마른다.

 

 상할머니때부터 우리식구는 감을 좋아했다. 어렸을적, 옆집의 감 나무에 노랗게 감이 열리면 침을 흘리며 목이 아프게 쳐다보곤 했다. 어쩌다 할머니 드시라고 노란 홍시 몇 개를 가져오면 우린 그 감이 빨갛고 물렁하게 익어가길 기다릴 수 없어서 할머니 안보실 때 손가락으로 꼭꼭눌러 보곤했다. 어떤때는 감이 물렁해 졌는데 할머니가 외출해서 안오시면, 할머니가 먼저 드시고 나서야 우리가 맛을 볼수 있기 때문에 감이 상할까봐 안절부절이였다.

 

저녁 먹기전에 하나 먹어 보라며 감을 씻던 동생은 언니, 홍시들이 한꺼번에 다 익어버렸어! 어떡하지? 안타깝다며 난리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눈치를 보며 단단함을 지키던 것들이, 하룻밤 사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물러졌다.그나저나 애들은 왜 하나씩 익지 않고 다 같이 익었다냐?고 내가 말하자,내가 익어가야 할 순서를 매겨 줄것을 그랬어.재치있는 동생의 말에 우리는 한 바탕  즐겁게 웃을 수 있었다. 꼭꼭 참아 두었던 달콤함을 더 숨길 수 없다는 듯, 껍질은 얇아지고 속살은  흐느적거린다. 나는 그 앞에서 괜히 마음이 바빠진다. 기쁨보다는 안타까움이 먼저 찾아온다.

 

 한두 개씩 천천히 익어 주었으면 좋았을것을. 오늘은 이 아이, 내일은 저 아이 하며 기다림의 여백을 남겨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홍시는 늘 그렇다. 때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준비가 덜 된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지도 않는다. 단맛이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이유 하나로, 모두 동시에 자기 자리를 내려놓아 버린다. 참을성 없는 우리 형제를 닮은 것 같다.

 

 나는 숟가락을 들고 서두른다. 흐르기 전에, 상하기 전에, 놓치기 전에, 단맛은 여전한데 마음은 왜 이렇게 허둥대는지. 맛있는 홍시를 보내주어서 잘 먹고 있다는 인사도 잊은채, 아침 저녁으로 먹기에 열중이다. 그래 할 수 없다. 우리가 먹을 수 있을 만큼 부지런히 먹고, 남은 것은 냉동실에 넣어 홍시 아이스크림이 되게하자.고 동생을 안심 시켰다.

 

  너무 많이, 너무 빨리 주어진 기쁨은 감사보다 부담이 된다는 걸 이때서야 깨닫는다. 한 번에 다 누릴 수 없는 것 앞에서 인간은 늘 초초해진다. 문득 삶도 홍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기회도, 감정도, 계절도 한꺼번에 몰려올때가 있다.그때 우리는 충분히 음미하지 못한 채 삼키거나 흘려보낸다. 천천히 익어 가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또 기다려 주지도 못한다.

 

  신문지 위 홍시 하나가 결국 터져 버린다. 가장 먼저 익은 것이 가장 먼저 상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심스레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다 가지려 하지 말자. 다 누리려 하지 말자. 조금 덜 익은 채로 남겨 두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홍시는 말없이 가르쳐 준다.

 

  오늘 나는 홍시를 먹었고, 동시에 계절 하나를 배웅했다. 너무 풍성해서 오히려 서글픈, 한꺼번에 익어 버린 달콤함을 안타까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