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에서/김영화

 

 

 

  이름을 되찾은 고궁에 왔다. 궁궐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함께 찬 바람에도 잘 견뎌온 파란 노송이 대견해 보인다. 본래 창경궁 터에는 1418년에 세운  수강궁이 있었다. 수강궁은 세종 때 상왕태종을 위해 창덕궁 동편에 창건한 궁이었다. 1483년에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해 이 터에 크게 궁궐을 짓고 창경궁이라 불렀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보충하여 왕과 왕비뿐만 아니라 후궁, 공주, 궁인의 처소로도 사용했다. 다른 궁궐과는 달리 건축 형식과 제도 면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세워지고, 이용된 궁궐이다. 창경궁은 남향으로 있는 다른 궁궐과는 달리 정문과 정전이 동향으로 배치되어있다.  임진왜란(1592)때서울의 다른 궁궐과 함께 불에 탔다가 1616년에 재건되었다. 이때 다시 세운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 등은 창경궁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 건물들이다. 일제강점기(1907~1910)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는 창경원으로 격하되었고, 광복 후 1983년에 창경궁으로 명칭을 되찾은 뒤 1990년대부터 본래의 궁궐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창경궁은 왕권의 과시보다 삶의 지속을 위해 지어졌다는 사실을, 발다닥으로 먼저 알게한다. 정복의 궁이 아니라 돌봄의 궁이었다. 성종이 대비들을 위해 지었고, 그래서 이곳의 건축은 위로 솟기보다 안으로 모인다. 창경궁은 파괴와 변형, 복구를 모두 겪었다. 명정전 앞마당에 서면, 왕이 백성을 내려다보았을 시선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이 왕을 바라보았을 거리가 느껴진다. 역사는 실패의 기록이기도 하다. 현종의 요절, 사도세자의 비극, 대비들의 외로운 노년, 창경궁은 이 비극들을 담담히 남겨두었다. 불편한 유산을 없애기보다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선택했다.

 

  2층 기와 지붕의 홍화문을 지나 명정전으로 들어가는 돌바닥 길은 중앙에 임금이 걷는길과 계단이있고  돌 비석으로 신하들이 서 있는 자리가 있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위엄한 명정전을 호위하듯 떠있다. 지붕위 양쪽 옆에는 6가지 동물 모양의 조각이 있고 이중 좀 큰 것은 화재때 소방소 역할을 한다고 궁 을 설명하는 분이 말한다. 명정전 안에는 4나무계단 위에 임금이 앉은 용상에는 용이 그려있고 그위에는 파란 산과 나무가 그려있다. 천장은 크고 작은 네모안에 5개의 꽃 모양이 그려있고 중앙에는 용이 그려있다. 드므는 방화수를 담는 용기로서, 화마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한다는 화재예방을 위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 큰 물통만한 동 그릇이 있다. 기와 담장 뒤에는 사시사철 초록 소나무가 지키고 있다.

 

 해설자를 따라서 약 50분간 창경궁을 돌면서 영조의 뛰어난 많은 업적을 들었다. 그리고 그가 그리도 사랑했던 아들 사도세자가 태어나서 자라고 독에 갇혀 죽게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정조의 검소했던 삶, 부모에 대한 효심을 보고 듣는다. 광해군과 인조 등 조선 왕들의 삶과 역사의 현장을 보며 다시 들었다. 정조와 왕비까지도 검소하고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임금이었다. 왕비의 평상시에 입었던 남색치마와 노란저고리, 그 당시그들의 밥상이 재현되어있다.  60년전에 초등학교 국사시간에  배우고 달달 외웠던 것들이 어렴풋이 살아남은 기억이 반추되는 시간이 되었다. 6학년 담임이셨던 류경자 선생님의 정열적인 수업모습이 해설자의 모습과 겹쳐 눈에 선하다.

 

 창경궁은 과거를 전시하는 장소가 아니라, 현재의 인간에게 윤리적 자세를 묻는 공간이다.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상처 입은 시간을 얼마나 정직하게 바라보는가? 역사는 돌에 새겨져 있지 않다. 우리의 얼이 들어있는 역사유산을 훼손시킨 일제때를 우리 후손들도 잊지말고 나라를 굳건하게 지켜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