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 고양이와 놀기 / 이상수
부드러운 꼬리가 햇살을 사냥한다. 살랑살랑 흔들다 바닥을 탁탁 치기도 하고 뱅글뱅글 돌다 왈칵 잡기도 한다. 비 갠 뒤, 오랜만의 햇살은 일용할 양식이다. 고양이 꼬리를 일본에서는 행복이라 부르기도 한다는데 샤미는 지금 행복을 잡는 중일까?
샤미를 만난 건 작은 아이가 고 3이 되던 해였다. 입시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줄여주고 싶어 동물을 입양하기로 했다. 살가운 강아지가 아니라 도도한 고양이를 선택한 것은 내 일상에 끼어들어 칭얼대며 귀찮게 하지 않으리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쩌면 타인의 일엔 전혀 관심 없는 듯한 무심함과 눈치 보지 않고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당당함, 세상이 두 쪽 나도 제 기분에 충실한 것이 선택을 결정짓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짧고 고운 털을 가진 태국산 샴고양이인 샤미는 다른 종보다 꼬리와 다리가 길고 날씬하다. 크림색 속 털 위에 귀를 비롯한 얼굴과 발, 꼬리는 초콜릿색으로 덮여있다. 야성적이고 독립적인 다른 고양이와 달리 사람을 좋아하고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내가 앓고 있을 때는 가까이 다가와 그루밍해주고 마음이 심란할 땐 살며시 손도 잡아주는 다정한 아이다.
아득한 옛날, 페르시아의 전설적 영웅 루스탐이 군대를 이끌고 가다 도둑 떼에 잡혀 곤욕을 치르는 한 노인을 구해주었다. 마술사였던 노인은 아름다운 것을 선물해 은혜를 갚고자 했지만 정중히 거절당했다. 그러자 모닥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한 줌과 빨간 불길 한 자락, 그리고 가장 빛나는 별 두 개를 따 고이 모아 쥐고‘후’하고 숨을 불어넣었다. 살며시 열린 손바닥 위에는 잿빛 털과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두 눈과 빨간 불길 같은 앙증맞은 혀를 가진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그렇게 고양이는 인간의 곁으로 왔다.
창가에서 일광욕하며 샤미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중이다. 무심한 표정으로 오른쪽 다리를 핥다가 치켜들어 귀를 비빈다. 유연하게 목을 휘감으며 털을 고르고 뱃가죽을 지나 발가락 사이도 꼼꼼하게 닦는다. 다시 왼쪽 다리를 치켜들어 핥아대다 귀를 턴다. 언제 어디서나 우아함을 잃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철저한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이리라.
샤미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창밖을 향해 풀쩍 뛰어오른다. 새 한 마리가 공기를 가르며 날고 있다. 창문에 부딪혀가며 도약해보지만 재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아쉬웠던지 사냥용 장난감을 물고와 훈련에 돌입한다. 모조 사냥감에서 한 발 떨어져 몸을 낮추고 명징한 눈빛을 보내며 공격할 타이밍을 노린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으려는 저 철저함이 고양이를 고양이로 만드는 것일까.
언제부턴가 내 집중력은 눈에 띄게 흐려졌다. 책을 읽다가도 딴생각에 빠져들고 일의 순서를 놓치기 일쑤다. 야망과 호기심은 흔적 없이 사라졌고 스스로 높은 벽을 세우고 뛰어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세상을 보는 넓은 안목을 가질 생각도 없이 손바닥만 한 세계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안락한 삶이 내 감각을 무디게 하는 것도 모르는 채 그저 내일도 오늘과 같이 평온하기를 바란다.
개와 고양이는 다른 점이 많다. 속도와 인내심이 개의 장점이라면 유연성은 고양이의 전유물이다. 두려움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서 개는 귀를 약간 젖히고 다리 사이로 꼬리를 말아 항복하지만 고양이는 몸에 있는 털을 모두 세우고 꼬리도 크게 부풀리며 당당히 맞선다.
샤미의 하악질을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살면서 나는 저처럼 삶에 대해 당당한 적이 있었던가? 많이 가진 이에겐 괜히 주눅 들었고 큰 소리 앞에선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추기도 했다. 옳은 일엔 주저했고 부정한 것은 애써 외면했다.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 앞에서 한 번도 결연하게 맞서본 적이 없으니 샤미에게서 배우는 점이 많다.
중국 신화에는 세계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신들은 고양이로 하여금 세상이 부드럽게 돌아가는지 돌보게 하는 한편, 다른 동물을 보살피는 임무를 맡겼다. 소통하고 지시를 내릴 수 있도록 언어능력과 부여했다. 하지만 고양이들은 벚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고 휘날리는 꽃잎 속에서 뛰어노는 게 더 좋았다. 고양이가 고사한 그 자리를 인간이 물려받았다. 그날 이후 인간들은 언어를 가진 대가로 바삐 움직이고 고양이들은 향기로운 햇볕을 쬐며 세상이 주는 기쁨을 즐기게 되었다.
말을 버린 것은 쓸데없는 구설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고도의 전술이 아니었을까. 지시하는 자리를 마다한 것은 미연에 암투를 방지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목 아래를 살살 쓸어 올리며 물어본다. 샤미는 다만 눈을 지그시 감고 턱을 위로 지켜 들며 말한다. “한쪽으로 비켜서 주시겠어요? 햇빛이 가려지지 않게요.”
어느 날, 외출했다 돌아오니 샤미가 오른발을 절뚝이며 걸었다. 사람의 손길을 좋아해 늘 부비부비 원하더니 구석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 아픈 다리를 핥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만지면 비명을 질렀다. 아파트 2~3층 높이에서도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다는 고양이가 다리를 절뚝이다니, 부랴부랴 동물병원으로 달려가 엑스레이를 찍었지만 수의사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행히 하루치 약을 먹고 회복했지만 나에게 받고 싶은 관심과 본능적인 무관심의 경계에서 줄타기하다 떨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넘치는 것은 언제나 화를 부른다. 움켜쥐려고 하면 자칫 집착되기 쉽고 놓아버리면 방임이 된다. 욕심내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인연도 언제든지 끊어질 수 있기에 진심으로 대하되 지나친 공을 들이지 않으려 하지만 집착과 방임 사이에서 나도 자주 낙마를 하곤 한다.
비어있는 샤미의 밥그릇을 채운다. 채우기 위해 언제나 고군분투하는 인간과 달리 배고프다고 허겁지겁 달려들지 않는다. 배부르게 먹는 일 없이 늘 정갈한 식사를 한다. 열심히 살아내도 모자라는 게 인간의 삶이라면 느긋하게 살아도 남는 게 고양이의 삶일까. 소유를 위해 제 기력을 소모하지 않는 관조자의 삶을 배워야 할 것 같다.
무릎에 올라온 샤미가 나를 쳐다본다. 커다란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는 잔잔한 우유니호수에 떠 있는 작은 섬 같다. 둥근 심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샤미가 둥글게 몸을 말고 잠이 든다. 나는 페르시아 마술사가 되어 ‘후!’하고 수염 난 얼굴에 입김을 불어넣는다. 그러자 허공에 모닥불이 일어나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올려다보는 밤하늘엔 가장 빛나는 별 두 개가 나를 보며 웃는다.
<에세이문학 2021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