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선택 / 김경애
E대병원 영안실이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지 얼추 40여 년은 지났지 싶다. 아장아장 걷는 꼬맹이 형제를 이끌고 내가 다니는 교회에 열심히 나오던 새댁이 어느새 60 중반의 여인이 되어 흰 국화 속에 파묻혀 있었다. 지난해 초가을, 그러니까 코로나19의 공포가 절정에 이르던 때의 일이다.
예전에 그녀는 나와 한 구역 식구로 건너편 동네에 살았다. 조실부모한 탓인지 누구에게나 살갑게 다가오고 남 도와주기를 천직인 양 여기며 즐겼다. 저 아랫녘 사람인데 음식솜씨가 깔끔해서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교회 공동체에선 자원해서 봉사부에 뛰어들어 궂은일 마다않고 솔선수범했다.
어느덧 최 아무개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평판이 자자했다. 1박 2일 기도원에 가는 날이면 김치는 물론 밑반찬까지 손수 만들어 교회 뜰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기도원 주방에선 앞치마 두른 그녀가 의례 배식판(配食板)에 음식을 나눠주곤 했다. 맛나게 먹었노라 칭찬하면 마치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어금니까지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나는 요리 방법을 물었고 그녀는 입맛까지 다셔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기도원 언저리 나물 중 먹는 나물과 먹지 못하는 나물로 잘도 구별했다. 어느 때는 ‘미나리아재’라며 검정 비닐에 듬뿍 담아 내 배낭에 슬쩍 밀어 넣어 주기도 했다. 집에 와 펼쳐보니 방금 딴 듯 향기 짙은 두릅 한 보시기 정도 신문지에 돌돌 말아 따로 질러있었다.
긴 날 동안 손끝을 움직여 모은 돈으로 변두리에 자그마한 땅뙈기를 장만했다. 거기에 고추농사를 지어 해마다 늦가을이면 청양고추 한보따리를 내 가슴에 안기고는 다른 교인들이 볼세라 눈 찡긋하며 얼른 돌아서곤 했다.
그런 따스한 그녀의 비보를 받고 나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한창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이 장안을 휩쓸 때라 모두들 말렸지만 나는 기를 쓰고 초행길을 찾아 나섰다.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강서구 발산동에 새로 지은 E대부속병원 영안실, 몇몇 교인들만 침통한 표정으로 영정 앞에 서 있을 뿐 장례식장은 썰렁했다. 그녀의 남편은 나를 보자 슬픔을 참느라 얼굴을 찡그리더니 뒤돌아서서 오열했다.
사인을 물으니 모두들 함구무언,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설마 했던 내 예감이 사실로 드러나는 낌새가 보이자 내 머리는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우울증에 사로잡혀 고통 속에 나날을 보냈다고 했다. 입원도 해보았는데 정신병동에서 지내기가 힘들어 퇴원하기를 몇 번, 끝내는 집에서 우울증과 씨름하다 목숨 줄을 놓았을 거라고 어느 측근이 귀띔해줄 뿐이었다. 떠난 사람은 말이 없다. 말이 없으니 사인을 알 길이 없다.
든든한 남편과 믿음직한 두 아들, 상냥한 며느리들에 아직 어린 네 명의 손자 손녀를 뒤로하고 영정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전염병으로 격리하지 않아도 되는 곳, 마음껏 베풀고 사랑 받는 곳. 소외감 따위와는 상관이 없는 곳… 그런 곳도 있노라 보여주기라도 하듯 해맑게 웃는다.
그녀에게 칭찬은 삶의 보람이고 밥이고 보약이지 않았을까. 에너지의 근원이지 싶다. 하기야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 그것이 생존의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알토란같은 혈육과 하나뿐인 목숨을 그깟 것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신앙인의 명제는 차치하고라도 그녀의 판단이 옳았는지 내 생각이 얕은지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녀는 사람의 눈빛이 그리웠고 따뜻한 말 한마디에 목말랐으리라. 품안을 떠난 두 아들은 다른 곳에 둥지를 틀었고 남편은 출근하고 교회에 나가는 길은 꽉 막혀버렸고 마치 천애고도(天涯孤島)에 갇힌 마음이었으리라. 그처럼 사람을 좋아하던 그녀에겐 감당치 못할 두려움이었나 보다. 코로나 부루의 기류가 내 가까이에도 있음을 비로소 느낀 날이었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누군가 설파했다지만 그건 한낱 괴변이라 생각한다. 목숨은 그 자체가 하늘의 선물이고 잘 살아내야 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우선 나 자신을 돌봐야겠지만 이웃을 살피며 보듬으며 함께 살아나가는 일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께 보답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는 그 이웃 돌보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만 나는 왜 그녀의 고민을 몰랐던가. 그가 나를 따르듯 나는 왜 그에게 좀 더 다가가지 않았던가. 꼭 껴안고 내 집에 데리고 와 그녀의 하소연을 날밤 새우며 들어줬어야 옳았다.
“우리 함께 하루만 살아보자, 딱 하루만 살아보자.”
삶의 극단에서 만나는 허망함을 함께 고민하고, 인생에 슬픔이라는 창窓만 있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창도 있다는 것을 알려줬어야 했다. 善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惡에 속한다고 했는데ㅡ
오늘, 그녀의 일주기를 맞아 유족들의 마음을 담은 화분이 교회 성전에 올려있었다.
<에세이문학 2021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