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 그 여정旅程 / 정태현                                                                                                               

쉽사리 지나치질 못한다. 아련한 기억과 암암한 풍경 그리고 사념들 때문이다. 빛바랜 회색 지붕과 일자형 단층 목조 건물, 먼발치에라도 간이역이 눈에 띄면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만다. 간이역 곁엔 철 지난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낙엽 진 미루나무와 소슬바람, 수척한 들판과 싸락눈이 머물러 있다.


그 곁을 그냥 지나치질 못해 대합실로 들어가 마른 풀잎 같은 내음을 맡아본다. 삶의 자잘한 무의와 일상의 조각들이 오롯이 그 안에 숨 쉬고 있다. 먼지 앉은 낡삭은 의자와 흐릿한 유리창, 어디선가 맵싸한 디젤 내음이 흘러들 것 같고 구석으로 밀려난 녹슨 석탄 난로가 눈을 감은 채 돌고 있다. 생의 도정에서 쉽사리 지나쳐 버린 삶의 여정과 풍경들이 그 안에 놓여 있다.


간이역은 저편의 외진 기억이다. 실그물에 담긴 삶은 계란, 심심풀이 땅콩과 오징어, 목쉰 기적 소리, 바람 찬 들판과 완행열차 곁에 간이역은 머물러 있다. 속도와 능률의 뒷전에 있고, 무시하고 지나쳐 버린 외진 곳에 있다. 그래도 기차를 타기 전 누군가에게 엽서를 부치던 빨간 우체통이 곁에 멀뚱히 서 있다.


간이역은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짝패다. 소박, 호젓, 설렘, 여유로움이 있는가 하면, 눈물, 이별, 소외, 외로움, 고단함이 들꽃처럼 서로 여윈 어깨를 기대고 있다. 소박 속에 소외가. 호젓 속에 외로움이, 설렘 속에 이별이, 여유로움 속에 고단함이 흥건히 고여 있다.


간이역은 이완과 불꽃이다. 멈춘 시간과 늘어진 지루함, 빛바랜 회억의 공간만은 아니다. 차표도 살 필요 없이 그저 기차에 올라타기만 하면 되는, 비록 애잔함과 무심(無心) 속일지라도 침목 곁의 푸른 시그널처럼 반짝임을 피어 올리는 순간의 불꽃이 숨어 있다. 졸고 있지만 다순 기운이 맴돌고, 늘어져 있지만 짱짱한 피돌기가 남모르게 똬리를 튼 채 속살을 채우고 있다.


간이역은 이별과 눈물이다. 만남보다는 이별하기에 마땅한 곳, 깃대에 매달린 깃발조차 그렁한 눈물에 젖어 있다. 떠나보내는 목마른 손길이 있고, 단선 철로 위를 고개 처박고 달리는 속울음이 담겨 있다. 급행열차가 경적을 울리며 무심히 통과하면, 하릴없이 흔들리는 역사 앞 깃대에선 한 방울 눈물 같은 쓸쓸함이, 툭 떨어진다.


간이역은 추억과의 만남이다. 세월 한 쪽에 동그마니 머물러 있는 한 줌 추회이다. 속도 속에서 사라진 기억이고, 흑백사진처럼 아련한 기억의 뒤란이며, 유년의 사진 한 장 뒤떨구어 놓은 오롯한 회색 창고이다. 하나 떨림으로 통과하던 터널이며, 기대로 발 동동거리면서 손목시계를 바라보던 마음자리다. 그 마음자리 곁엔 무량한 강물이 켜켜이 흐르고 있다.


간이역은 희망이며 설렘이다. 힘차게 요동치며 출발을 알리는 기적소리가 희망의 신발 끈을 매고 있다. 산모롱이 저편에 대한 동경과 기대가 담겨 있다. 눈을 떠 미지를 향하는 설렘을 잉태하는 쪽문이다. 깃발을 흔들며 내일을 기대하는 기다림의 등불이 곱게 타오른다.


간이역은 낭만과 외로움이다. 노을 비낀 풍경 속에 고단한 삶의 세목이 있다. 빈 뜨락에 잿빛 비둘기 몇 마리 회상처럼 머물다 가면, 포플린 판박이 저고리에 꽃무늬 양산을 든 여인이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곳이다. 하루 수십 대의 기차가 오가지만 오직 무궁화호만 서너 대 잠깐 머무는 역무원조차 없는, 녹슨 철로, 침묵하는 침목, 기웃거리던 잠자리조차 발길을 돌리면 비수 같은 쓸쓸함이 등 뒤에 와 꽂히는 적요다.


간이역은 기다림이며 깨달음이다. 하염없는 해바라기와 손을 흔드는 코스모스가 어우러진 곳, 그리움이 육화 돼 기억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그렇다고 속도를 방해하는 훼방꾼이 아니며 쓸모없는 우수리도 아니다. 속도 지상주의가 무시하고 지나쳐 버린, 또 다른 가치를 표상한다. 외려 기다리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열매가 익어가는 텃밭이다. 그 열매가 들크무레하게 익을 때쯤이면 기다리는 이의 눈빛은 깊어지고 눈매는 능선처럼 아슴아슴해진다.


간이역은 흔적이며 길이다. 오직 선로 위만을 오가며 달려야 하는 가슴 졸임의 비탈길이다. 뭇사람의 옷깃이 스쳐 간 길목이고, 떠난 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조붓한 통로이다. 떠나며 돌아오는 길, 불현듯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 하나 아삼삼하게 떠오르는 골목이다. 곤때 묻은 옷자락과 땀에 전 손수건이 있으며, 해 저무는 철로에 밤 그늘이 머물기 위해 자리를 자는 사랑채이다.


간이역은 멈춤과 출발이다. 꺽쇤 기적소리, 가기 위해서 멈춰야 하고 더 멀리 가기 위해서 잠시 머물러야 하는 거점이다. 하나 다시 등 떠 밀려가는 강물처럼 흘러가야 하고, 출발을 위해서 다시 멱차오르게 힘을 추슬러야 하는 꿈의 저장소이다.


간이역,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터널이고 올 수밖에 없는 애환의 건널목이다. 애오라지 먼 곳을 돌고 돌아 또다시 막차를 기다리는 사립문이다. 시린 인생열차, 시방 간이역에 서 있다. 그 간이역 시그널 옆에 가을 나그네로 나는 묵연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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