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사라져간생의 콜라주-허물어진 담장 /  민병일

 

 시간이 전복된 풍경을 길어 올렸다.

돌과 돌 사이 황토를 개어 만든 반쯤 허물어진 담장은 우리 생의 이정표 같다.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 낯설게 다가오는 건 전복된 시간이 액자화 됐기 때문이다. 이 순간,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들은 앎의 그물망을 빠져나간다. 안다고, 알고 있다고, 했던 일상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이 무렵이다. 풍경이 정지된 저 사진이 낯설게 다가오는 것도 그 이유다.

 

시간에는 가면이 없다.

시간은 우주에서 가장 순정한 결정체이기에 스스로 저 자신을 파괴한다. 시간은 자신의 세계를 산산조각 내며 시간이 된다. 자기를 파괴하고 부정하고 산산조각 내며 시간이 되어가는 시간. 시간마저 정지시킨 풍경 속의 사진이 가슴을 쿡 지르는 것은 추억을 환기시켜서가 아니라, 시간을 전복시켜 삶을 낯설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풍경에도 가면이 없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고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눈부신 사진 속 풍경이 된 것은 풍경의 시간 역시 순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마주친 풍경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허물어지고 있는 담벼락과 빛바래 하얗게 세어버린 나무기둥과 생의 밥거리를 담아놓았던 엎어진 옹기와 나뒹군 검정고무신과 담벼락 뒤의 허술한 시간을 가리기 위해 임시로 세워둔 검은 생철 판과 이 모든 것에 아름답고 슬픈 시간을 수놓은 꽃들.

 

시간이 멈춘 지 오래된 사진 속 시간의 풍경은 서로 다른 오브제들이 모여 완성된 콜라주처럼 생의 흔적을 완성했다. 그러나 미완성을 위한 완성. 시간의 흔적은 소멸되고 풍경의 흔적은 망각된다. 사진은 소멸되고 망각되어지는 것들을 호명하여 말러의 교향곡 5번 아다지에토처럼 진혼곡이라도 연주하듯 눈앞에 펼쳐 보인다. 사진으로 완성된 풍경은 풍경이 아니다. 사진 속 무너져가는 담벼락을 보라! 시간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해체되어가는 삶처럼 담벼락에 기댄 풍경도 낯선 시간 속으로 해체되는 중이다.

 

시간의 거울에 비쳐진 사진 속 풍경이 애달픈 것은 무너져가는 시간을 포르노그래피적으로 증언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시간의 허무를 포르노적으로 드러낸다. 그 앞에서 인간이나 담벼락이나 옹기, 검정고무신, 나무 기둥, 꽃이나 모두 무기력한 타자다.

 

시골 마을에서 만났던 사진 속 시간의 풍경은 무엇일까.

저것은 지상계 풍경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흙, 공기, 불, 물로 설명한 지상계 풍경이 아니라 5원소라는 퀸타 에센티아, 즉 투명하고 순수한 공간으로서의 에테르로 에워싸인 지상 너머 풍경이다. 에테르는 우리 곁을 스쳐 지나는 보살이나 성모마리아의 현현처럼 빛의 여울에 싸여 있다. 붙잡고 싶지만 붙잡히지 않고, 아름답지만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사라져간, 생의 콜라주.

 

세상에서 추방당한 시인의 눈에 저 사진이 아름다웠던 것은 풍경 역시 마을에서 추방당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며 그것은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덜 개화됐던 스물일곱 해 전 풍경이라서가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궁핍한 시간을 낯설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낯섦은 생을 떨리게 한다. 무기력하게 굳어져가는 심장에 파동을 일으켜 정신의 심장에 파란 피를 돌게 하는 낯선 떨림. 사진은 낯선 떨림을 비추는 거울이다.

 

농부가 버리고 간 뒤집어진 옹기와 검정고무신과 그 옆의 뒤집어 놓은 독 위에서 녹슬고 있는 호미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농부의 버려진 사물들과 마네의 그림이 겹쳐지는 부분은 불편함이다. 마네의 올림피아가 시대와 인간을 비춰주는 거울로 작동한 것처럼,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사라져간 생이 콜라주 같은 담장도 우리들 삶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허물어진 담장 아래서 시간은 그렇게 또 흘러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남은 담장마저 허물어지고 농부가 버리고 간 옹기와 검정고무신, 녹슨 호미마저 사라지고 나면 우리를 조금은 불편하게 했던 풍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기억도 나지 않을 것이다. 사라지는 풍경 속의 삶은 애달프고 남겨진 것들은 무언가를 증언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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