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하우스 위로 운석이 떨어졌다. 장갑을 낀 지질학자 몇이 수상한 돌덩이를 조심스레 거둬 갔다. 극지연구소의 분석 결과 그날 진주에 떨어진 두 개의 암석은 별에서 온 게 확실하다 했다. '별에서 온 그대'는 하늘의 로또라, 부르는 게 값일 만큼 귀하신 몸이어서 뉴스를 접한 사람들마다 자다가 떡 얻어먹은 하우스 주인을 대박이 터졌다며 부러워했다.
올여름, 나도 대박을 터트렸다. 내 집에도 별 그대가 당도한 것이다. 친견 일자를 통보받고부터 내도록 가슴을 설레며 기다렸다. 어느 별에선가 성운에선가 새로 출시되어 배송되어 온 특허품은 엄정하게 말하면 '메이드 인 헤븐' OEM인 셈이다. 3년 전쯤 지구별 모퉁이에 M&A로 설립된 합작공장에서 처녀 생산된 하청품인 바, 식구들 모두 진귀한 신상품을 완상 하느라 넋이 반쯤 빠져 지낸다.
"나 어제 손자 동영상 상영하고 배춧잎 다섯 장 꺼내 놓고 왔어. 한 번 보여주는 건 한 장이면 되는데 동영상이라고 다섯 장 내라 하데."
동창회에서 만난 은경이는 그러고도 연신 싱글거렸다. 특별히 공을 세우지 않아도 오래 산 여자들에게 공로상 정도로 주어지는 타이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배역을 앞다투어 자랑하느라 바쁘다. 왜 그리들 손자손녀에 깜빡 죽을까.
아기가 방긋, 눈 맞추며 웃는다. 뭐라고 제법 옹알이도 한다. 이제 겨우 두어 달이니 어쩌다 만나는 얼굴을 알아봐서 웃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 웃음, 중독성이 있다. 어둑한 전생 어느 꿈속에서 잠깐 스친 적이 있던 것도 같고 수억 광년 어느 갈피엔가 모두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되풀이하는 138억 년 전 우주 먼지에 다름 아닐 터, 무한 우주를 떠돌던 먼지 입자들이 인연을 따라 수렴되어 현상계의 유기체로, 그것도 인간으로 착상되는 기적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의지가 작동하지 않았다면 갸름한 송가네 두상과 투박한 조가네 콧대를 빼다 박듯 섞어 담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같은 인연, 산신령도 삼신할미도 믿지 않지만 '점지'라는 말뜻을 비로소 실감한다.
생명이란 기氣의 이합집산이라 모이면 생生 하는 것이요, 흩어지면 죽는 것이라 했다. 제 안의 빛이 까무룩 사위어 생의 기미가 쇠해질 즈음, 꺼져 가는 빛만큼의 생기와 활력을 아웃소싱으로 보완해 주는 마련이 손자· 손녀라는 축복일 것이다. 고립계의 에너지가 다른 것으로 변환될 수는 있어도 생성되거나 파괴될 수는 없다는 열역학 제1법칙이 틀리지 않는다면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품겨 있는 에너지는 이미 존재하는, 또는 존재했던 생명체로부터 회수되어 응집된 재활용품이어야 맞다. 수명이 다해 가는 별에서 방출된 가스가 모여 엄청난 양의 성간물질을 이루고 이들이 밀집되어 새로운 별이 탄생되듯이.
휴일 오후, 천변을 걷는다. 푸른빛이 꺼져 가는 늦가을 물가가 장판지 빛으로 누렇게 익어 있다. 쇠 부스러기 같은 씨앗들을 부슬부슬 매달고 서 있는 소리쟁이도 녹슨 연장처럼 초췌하게 흔들린다. 공작국화 마른 줄기를 매정하게 훑고 달아나던 바람이 기어이 귓가에 오금을 박는다. 그대 더는 물을 길어 올리지 못하리.
"꽃이 지니까 다 지더만, 그렇게 한 방에 훅, 가더만….
이제 호시절은 끝난 것 같다고, 갱년기가 되니 만사가 다 시들해지더라고, 시무룩한 얼굴로 동생이 말했다. 그래, 너도 드디어 잉여인간의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구나 하는 말을, 나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생명체라는 것이 물 발자국에 다름 아님을 오십 넘은 여자는 몸으로 체감한다. 몸 안팎의 물기가 현저하게 거두어져 피부가 땅기고 감성이 말라붙는다. 손톱과 머리카락이 푸석해지고 무릎관절이 자주 삐걱거린다. 남자라고 뭐 다르겠는가. 핵융합반응을 끝낸 별들이 중성자별이나 블랙홀로 빛을 잃고 스러져 가듯 인간 또한 나이가 들면 +나 -전하를 잃고 중성적으로 방전되어 버린다. 자성磁性이 약하니 끌림이 없고 끌림이 없으니 불꽃이 튀지 않는다. 빛과 먼지로 된 인간에게서 빛은 날아가고 먼지만 남게 되는, 늙음이란 그런 과정 아닐까.
황제내경에 따르면 여자는 일생 7배의 배수로 일곱 번, 남자는 8배의 배수로 여덟 번의 변화를 거친다고 한다. 여성 또는 남성으로 살아 낼 수 있는 마지노선이 여자는 대충 49(7×7)세, 남자는 64(8×8)세라는 것이다. 거참 하느님도 불공평하시지, 남자에게만 왜 15년을 더? 15년은 기다려야 씨앗을 생산할 능력이 생기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어찌됐건 간에, 폐경 지난 여자도, 물 마른 소리쟁이도 씨 맺은 것들은 다 끝났다. 섹스어필하지 못한 것들은 가차 없이 열외로 추방하고 마는, 그것이 이 행성의 불문법칙이니까. 인간뿐 아니라 목숨 받고 태어난 생명체들이 다 그렇다. 꽃 피고 씨 맺고, 새끼 낳고 늙어지면 불문곡직 떠나 주어야 하는 것, 얄짤없고 냉엄한 자연의 섭리다. 자분치가 갈수로 희끗해지는 것도 그만큼 살았으면 지상에서 네 할 일은 얼추 끝낸 줄 알라는, 준엄한 경고장일지도 모른다.
누런 풀들이 말을 건네 온다. 풀들도 예의가 있어 일행이 있으면 말을 붙이지 않는다. 독대를 하지 않고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것쯤 알고 있는 눈치다. 세세하게 속살대지 않고 간간이 운만 띄우는데 그마저도 나는 거지반 놓친다. 미라처럼 마른 몸으로 칼바람에 사운거리는 억새들의 이야기를 주워들은 것도 이 천변을 오가면서였다.
'할일 다 끝냈는데 왜 냉큼 드러눕지 않느냐고? 오는 눈 가는 바람 맨몸으로 견디고 버팅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 이렇게 모여서 스크럼을 짜고 바리케이드라도 쳐 주어야 땅속 어린것들이 겨우내 얼지 않고 바람 구두를 신고 달려드는 온갖 뜨내기 씨앗들이 우리 울타리를 넘보지 않거든….
죽어서도 죽지 못한 억새풀들은 어린 풀들이 철없이 키 재기를 하려 드는 초여름 무렵에야 장맛비에 풀썩 쓰러져 눕는다. 나름의 소명을 완수하고 제 살던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썩은 육신까지 자양으로 내주는 풀들의 한생을 목도하고 나서야 무딘 나는 가까스로 생명의 비의를 알아차렸다. 거듭나기 위해 몸을 버려야 하는 이치를. 일단 흙으로 돌아갔다가 푸르게 솟아오르는 물관을 타고 다시 솟구쳐 한들거려 보는 것, 그렇게 껍질을 바꾸어 가며 은밀하게 생기를 전수하는 것, 그것이 필멸의 목숨이 불멸을 사는 영생불사의 방편이며 시간의 틀에 갇힌 생명들이 시간의 지배를 넘어서는 비법이라는 것을, 풀 한 포기도 조상의 음덕으로 살아 낸다는 것을 알고부터 제사 준비하는 일도 번거롭지 않았다.
냉이 씨앗들이 사사사사 흔들린다. 봄날 천변을 하얗게 뒤덮던 꽃들이 하트 모양의 누런 삭과들을 줄줄이 매달고 젱그렁거린다. 수천수만의 자잘한 하트들이 저녁 바람에 몸을 뒤치며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를 연발한다. 이 도시에 만연한 사랑은 어쩌면 이 천변의 녹색공단에서 밤낮없이 생산되어 흩뿌려지는지 모른다. 온몸으로 사랑의 돌림노래를 부르며 순환하는 우주법칙에 순응하면서 돌아가고 또 돌아오는 세상, 살아 숨 쉬는 생명들의 장엄한 서사에 저무는 천변이 일시 환하다.
천변 아파트에 불이 켜진다. 좀 있으면 별도 돋을 것이다. 엉덩이가 빨간 자동차들이 간선도로 위를 부지런히 달린다.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 갈피갈피에 아기의 말간 웃음이, 눈빛이 일렁인다. 닫힌 몸을 열 때마다 그녀의 그녀들이 겹겹이 등장하는 러시아 인현 마트료시카처럼 내 몸을 관통해 빠져나간 시간들도 아이의 아이 안에 고요하게 응축되어 오래오래 비어져 나올 것이다. 어스름한 적년積年의 모퉁이를 비추며 돋쳐 오르는 새 빛에 나 또한 환하게 늙어 갈 것이다. 멀어진 것들을 더듬어 찾으며 쓸쓸함도 잠시 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