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의 애인 / 전 민
긴기아난을 아셔유?
봄에 책을 만들고 며칠 되지 않은 굉일이었슈. 딴에는 큰일을 해낸 뒤라서 식구들이 조촐한 축하 자리를 마련했넌디유, 느닷없이 나타난 코로나19가 훼방을 놓아 그냥 집에서 간소하게 피자와 치킨을 시켜 먹기로 허지 않았겄슈. 그날 녀석이 손에 들고 온 것이 이름도 생소한 긴기아난이란 화초여유. 대나무와 비슷허게 줄기에 마디가 있는 난초과 양란인디 꽃향이 아주 좋더라구유.
갸 엄마 말에 따르면, 골목 어귀에 있는 간이 화원을 지나는데 할머니헌티 줄 꽃을 사야 한다믄서 놈이 굳이 제 지갑을 열어야 한다고 하더래유. 평소 여간해선 돈을 잘 쓰지 않는 애라 워쩐일인가 했대유. 자잘한 분홍색 꽃망울이 필락 말락 맺혀 있어 단박에 눈길이 가더먼유. 웃음이 물린 내 얼굴을 보는 녀석의 뺨도 환하게 빛났지유. 마침 남아있는 마땅한 화분이 있어 분갈이를 하려고 봉다리를 들고 복도로 나갔슈. 근디 비좁은 통에 뿌리가 어찌나 억세게 뒤엉켰는지 자칫하다가는 마디를 분지를 것 같더라구유. 생각다 못혀 도로 화원으로 들고 가 도움을 받으려는데 녀석이 기어코 신발을 신고 따라나서잖유. 그러고는 몇 걸음 가잖은 갈림길에서 그러능규.
“할머니, 나 할아버지한테 가서 잠깐 인사하고 올 게 꽃 다 옮기면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단단히 엉겨 붙은 뿌리와 검정 플라스틱 화분을 떼어내느라 꽃집 주인도 애를 먹더먼유. 그러구러 기름한 사기 화분에 옮겨심고 녀석을 다시 만나 집으로 왔쥬. 감격의 순간은 그 다음 날에 왔슈. 옆에 양반이 아침밥을 먹다가 어허, 어제 그 말을 한다는 걸 깜빡했네 하믄서 가심팍 물결치는 얘길 끄내지 않것슈.
“글쎄 갸가 상가 문을 밀고 들어서더니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문구용품을 만작거리면서 슬쩍 운을 띄지 않겄어. 지가 꽃을 주니 할머니가 엄청 좋아했다믄서 할아버지는 무슨 꽃을 준비했냐고 하데. 난 그런 생각 못혔다 했지. 아, 그랬더니 이놈 표정이 대뜸 달라지더라고. 별수 있남. 서랍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흔들었지. 이걸로 안 될라나 눈치를 보믄서 말여. 그제야 맘이 놓이는지 놈이 씨익 웃더니, ‘어, 그럼 됐어. 됐어. 할아버지 이따 봐!’하고는 서둘러 나가더라구. 키는 커다래가지고 내 참, 그런 능청스런 녀석은 츰봤어.”
워뜌, 자랑질 헐만 허쥬? 이만큼 몸과 마음을 바쳐 할미 챙기는 손주가 장안에 몇이나 되겄슈. 어리숭한 할아버지가 좋은 날 주파수를 못 맞춰 할머니 기분이 어그러질세라 속 짚은 생각을 한 기특한 놈. 놈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는 참말로 무슨 낙으로 살까 싶유. 애당초 갸가 보통 애는 아니었슈. 잉태될 때부텀 느낌이 예사롭지 않더라구유. 팔뚝만한 구렝이가 등을 타고 올라와 지 오른쪽 어깨에 머리를 척 걸쳤는데두 이상하게 숭허들 않고 따숩더란 말이쥬. 그려선가 더러 한숨을 쉬고 끙끙거리며 살지만 요 귀염둥이 녀석과 장군멍군 사랑놀이를 하다 보니 지가 늙을 새가 웂다니께유.
내 보매 갸는 전생에 지 애인이 아니었나 싶유. 그러지 않고서야 워치기 그런 말도 안 되는 감동의 폭포수를 줄창 쏟아내느냐 말유. 오늘도 전화가 두 번이나 온 거 있쥬. 먼첨은 핵교 끝나고 집에 가는 중이라 혔고, 야중은 피아노학원에 가는 길이라 허대유. 막간이라도 할미 목소리를 들어야 힘이 난다나 워쩐다나. 좌우지간 지금 속으로 말도 뭇허구 은근히 열 받치는 사람 있으믄 괜히 뒤웅파지 말고 지 얘기를 마저 들어봐유.
그러저러하다는 소리지 하마 뻐기는 건 아뉴. 지금 즈이집 작은 거실은 놈의 손길이 닿은 물건들로 넘쳐나유. 어느 날은 글쟁이 할머니란 걸 염두에 뒀는지 <우동 한 그릇> 동화 속 가게 안을 통째로 꾸민 공작품을 맹글어 오질 않나. 계절이 몇 번 지나도록 여행 한번 못 가는 할미를 위해 에펠탑과 빅벤을 레고로 조립해오질 않나. 나무 좋아하는 할머니란 건 어찌 알고 핵교운동장 나눔장터에서 입 쩍 벌린 두꺼비 목조각품을 찾아 들고 오질 않나. 색색의 종이우산을 접어 자작나무에 매달아온 건 덤으로 쳐유. 이 소품들이 시방 제 삶을 채우는 바탕화면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거구먼유. 그러고 보니 워다 내세울 만큼 도두보이는 삶은 아녀도 시방이 제우(겨우) 앞가림하고 살아온 여자의 꽃자리라 여겨도 되겠는 걸유.
녀석이 해가 다르게 커가는 걸 보믄 어느 별에서 온 왕자인가 싶드만, 요샌 출생아가 부쩍 줄어 신생아 절벽이란 말까지 나오데유. 숫제 아기를 낳지 않고 딩크족으로 사는 부부도 많다믄서유. 젊은 사람덜이 나이를 먹어봤어야 알쥬. 햇곡식 같은 아이들이 주는 신선한 자극과 해맑은 웃음소리가 밋밋한 일상을 을마나 활기차게 하는지. 지가 할머니 소린 들어도 아주 개념 웂는 멍텅구린 아뉴. 넘치는 사랑을 받을 때는 다 이유가 있쥬. 이제는 슬슬 나를 골려 먹기도 하는 재간둥이 그놈에게 무얼 아끼겠어유. 돌림병 소용돌이가 그치고 닫힌 창이 열리면 꿈이 건축가라는 녀석과 함께 일본 나오시마 섬에 가려구유. 후딱 커서 할머니 차 사주고 다이아반지 사준다고 벼르는 놈의 마음 푼엔 댈 바 아니지만, 거기 가서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베넷하우스에 머물며 지중미술관을 뵈주고, 바닷가에 있는 유명한 땡땡이 무늬 커다란 호박덩이를 구경하며 녀석의 더듬이에 촉기가 서리게 하려구유. 누가 알유? 손재주 좋고 눈썰미 뛰어나고 개구진 그놈이 요담에 제2의 김수근, 르꼬르뷔제, 가우디가 되어 지구촌 곳곳에 이름을 떨치게 될 줄.
하하. 헛꿈 그만 꾸라고유? 그류, 알았슈. 허방칠 땐 허방치더라도 흥오른 가락에 꼿짜리(속) 좁게 그러지 말고 얼쑤~ 추임새나 한번 느줘유. 모듬살이에 경고등이 켜지고 발 묶인 지 한참인데 이런 낙도 웂이 어트게 지루한 시간을 보낸대유. 세월에 등 떠밀려 가는 인생, 해거름 지를 태운 마차가 덜그렁 덜그렁 이렇게 굴러가네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