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널기 / 이신애

 

까마귀는 아무 때나 울지 않는다. 그런데 "악-"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물에 빠진 것 같아서 사방을 둘러보니 내 방이었다. 야트막한 산을 거의 수직으로 깎고 고층아파트를 지은 탓으로 도로가 운하처럼 깊어졌다.

차는 지나가 버리지만 소리는 집과 산 사이에 갇혀서 우물 속의 징처럼 울리곤 했다. 한밤중에 잠이 깨면 희부연 천정이 하얘지는 것처럼 머릿속이 말개져서 다시 자려고 수없이 뒤척여도 소용이 없었다. 그게 싫어서 돌멩이 밑의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었더니 자동차를 따라갔던 잠이 슬그머니 꿈과 함께 왔다.

둥근 선실 창으로 보이는 가파른 석회암 절벽이 어디서 본듯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운하의 가장 좁은 곳은 24m로 그보다 큰 배는 지나갈 수 없다. 엔진의 진동으로 운하가 무너질까봐 예인선이 배를 끌고 있었다. 나는 갑판에서 사람 손으로 팠다는 운하를 구경하다 가로질러 놓인 다리를 여러 개 보았다.

그 중 새집처럼 튀어나온 곳에서 누군가 뛰어내렸다. 그는 발목을 잡아맨 줄 때문에 반동으로 튀어 올랐다가 잠시 후에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나였다. 키가 크는 나이도 아닌데 배를 타는가 하면 번지까지 하다니... 너무 떠나고 싶었나보다. 여행 중에 번지하는 사람을 본 곳은 호주이고, 크루즈를 탔던 곳은 덴마크인데 모든 게 색색으로 이어 붙인 조각 이불처럼 각각이면서 하나였다.

깊은 해협은 그리스 코린트일 것이다. '고린도 Corinth'를 요즘은 그렇게 읽으니 낯선 곳 같지만 중동이나 유럽의 어떤 지명들은 사실 성서에서 익히 본, 알만한 곳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와 현재의 외래어 표기가 너무 달라져서 전혀 다른 지명같이 들린다. 외국어에 대한 지침이 있어도 모두들 원어에 가깝게 읽고 쓰니 더 헛갈린다. 뇌도 컴퓨터처럼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면 좋을텐데 원본 불변인 내 머리는 가끔 버벅대지만 그것도 새것일 때가 있었다.

초등학생 때였다. 방학이라 친구가 없어 심심하다고 투정하니까 교회에 가라고 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동무들을 보러 호기심에 가봤다. 방학이 끝날 무렵 성경 암송대회가 있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애면글면 외워서 상으로 세로글씨 성경을 받았는데 지금도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나 때가 오면...그 때에 내가 온전히 알리라.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가 기억나는 것을 보면 무심결에라도 삭제delete 키를 누르지 않았나보다.

바이블은 세계 제1의 베스트셀러답게 온갖 지혜가 그 속에 있어서 어디를 펼쳐도 잠언이요, 아포리즘인데 그건 놔두고 땅에 꾹 박힌 염소 매는 말뚝처럼 하루 종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기도문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했기 때문에 혹시 아버지를 볼까 해서였다. 성서는 교과서와 달리 전과와 참고서가 없어서 자습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낱말처럼 사전을 찾아보고 이해할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모르니까 잘 못보고 뿌리가 있어도 물 위에 떠 있는 부평초같이 불안했다.

봄이 되어 먼 산이 다가오고 뒷산에 달래가 머리카락을 풀어놓은 듯하면 들머리에 서서 바람을 맞곤 했다. 사람들은 치마폭과 잔등이 돛처럼 부풀어 오른 것만 보았지 마음이 혼자 버스를 타고 읍내를 서너 바퀴 돌아 덕숭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온 것은 몰랐다. 심심하면 친구와 나무에 기어 올라갔다. 쭉 뻗은 가지에 다리를 걸고 팔을 늘어뜨린 후 해파리처럼 흐늘거렸는데 멀리에서 보면 나무에 빨래를 널어놓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나무는 벼랑 꼭대기에 아찔하게 서 있었는데 나는 늘 보아서 아무렇지 않았다. 언덕 밑을 지나시던 어른들이 내려오라고 손짓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날도‘빨래 널기’를 마치고, 절벽 아래를 보니 구절초, 억새, 싸리 같은 게 보였다. 굵은 모래가 하얗게 깔린 곳에 아기 포크만한 연두색 싸리 순이 소복했다. 오빠들보다 나무를 잘 타는 친구가 삶아 무쳐먹으면 아삭한 그 나물을 그냥 둘 리 없었다.

왜 그게 그대로 있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는 친구를 만날 수 없게 만든 마지막 장면은 초기화format 할 수 없는 확장자exe가 되었다. '빨래'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아려서 양말이나 손수건을 주물거리다 꼭 짜지 못해 흘러내리는 물만 보아도 어느덧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읽었을 때 친구가 그리워 다시 나무에 올라가고 싶었다. 한번은 빨랫줄에 색색의 옷을 그렸다가 지웠고, 나중에는 커다란 나무에 노란 리본을 다는 것으로 두루뭉술하게 끝을 냈다. 결국 나무에 걸터앉거나, 높은 곳을 쳐다보는 건 그만두었다.

발을 묶은 줄이 흔들거림을 멈추지도 않았는데 작은 배가 다가왔다. 줄을 풀고 일어서려는 찰라 보트가 기우뚱하더니 사람들을 물에 빠뜨렸다. 모두 '악-'소리를 질렀다. 까마귀 소리가 아니었다. 또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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