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밥 / 한효정
자유로를 달렸다. 새로 나올 책의 인쇄 감리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장항 IC에 다 와 가는데 도로 위를 하얗게 날아다니는 것이 있었다. 처음엔 새 떼인가 했다. 새 떼가 아니었다. 꽃이 지고 있나 했다. 꽃도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것은 종이였다. 달리는 트럭에서 인쇄용 종이가 무더기로 떨어진 것이었다. 전지 크기의 종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날았다. 자동차 앞 유리로 날아와 시야를 가리기도 하고, 바퀴 아래로 쓸려 들어가기도 했다. 그것은 상여에서 떨어진 흰 꽃송이들 같았고, 헬리콥터에서 뿌려대던 삐라 같았다.
장항IC로 나왔다. 세 개의 주유소를 지나 일산장례식장을 끼고 우회전을 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좁은 길을 더 깊숙이 들어가자 인쇄소와 제본소, 파지처리장이 밀집해 있는 골목들이 나왔다. 책들이 태어나고 죽는 곳, 다시 말해 책의 분만실과 장례식장이 한데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 종이밥을 먹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동네 슈퍼에 들러 인쇄소 식구들에게 줄 초코파이와 오렌지 주스를 샀다. 인쇄소 마당에 내렸을 때 한낮의 태양이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아직 초여름이었으나 이 햇살 아래에 오 분만 서 있으면 질식할 것 같았다.
종이가 산더미처럼 쌓인 작업장 안으로 들어서자 가열된 인쇄지에서 후끈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람들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일을 하고 있었다. 감리를 하는데 한나절이나 결렸다. 이번 책은 화보가 많아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인쇄기가 돌아가는 소음 속에서는 목소리를 높여야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색상을 컨펌하고, 인쇄가 진행되는 틈을 타 잠깐 제본소에 들렀다.
김 씨 아저씨가 지게차를 운전하다가 손을 흔들어 알은 체를 했다. 오래 전 재단기에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잃었다는 김 씨 아저씨의 팔과 손등에는 긁히고 베인 자국들이 선명했다. 제본할 때의 주의사항들을 반복해서 일러두고 다시 인쇄소로 오는 길. 파지처리장 앞을 지나게 되었다. 파쇄된 책들이 모여드는, 말하자면 책들의 무덤이었다. 잘못 만들어져 처음부터 이곳으로 온 책도 있고, 서점으로 나갔다가 반품되어 돌아온 책도 있을 처였다. 매대에 한번 누워보지도 못한 채 폐기된 책도 적지 않을 것이다. 몇 해 전 일이 떠올랐다.
내가 운영하던 출판사에서 책을 낸 저자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사소한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었다. 배송사 창고엔 한 번도 서점으로 나가보지 못한 책들과 팔지 않아 돌아온 책들이 먼지와 함께 쌓여가고 있었다. 고소인과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더 이상 책을 판매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서점에 해당 도서의 판매중지요청 공문을 띄웠다. 일 년여의 고심 끝에 나온 책이었다. 판매중지로 돌아온 수천 권의 책들은 절단기에 허리가 두 동강이 났다. 자다가도 내 허리를 몇 번이나 쓸어내렸다. 트럭 한 대 분량의 폐지 값이 책 한두 권 값밖에 되지 않았다. 그 시간은 결국 ‘혐의 없음’으로 판정이 났지만, 무리해서 책을 찍어낸 탓에 손해를 감당할 수 없어 사무실을 내놓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파지처리장 앞에 섰다. 거대한 종이더미들을 올려다보았다. 수의 한 벌 없이 밧줄에 꽁꽁 묶여서 입관을 기다리는 망자들 같았다. 책으로서의 존엄은 물 건너간 지 오래다. 그 누구도 애도하는 이 없었다. 조용히 소멸을 기다릴 뿐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책들 앞에서 나는 다시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 하얀 더미 속에 눌러 있을 글자들을 생각했다. 종이 속에 숨도 못 쉬고 박혀 있을 새까만 문장들. 그것은 한때 사랑이었고, 욕망이었고, 상실이었고, 슬픔이었던 페이지들일 것이었다. 나오자마자 콧바람 한번 쏘일 틈도 없이 접히고 만 페이지들…. 툭 발밑으로 책 한 권이 굴러 떨어졌다. 나는 책을 집어 들었다. 책 속의 글자들이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그들은 영영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부활을 꿈꾸고 있었다. 나무였던, 종이였던, 책이었던 기억을 되살려 더 좋은 책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책들의 종말을 바라보는 일은 쓸쓸하지만, 그들이 머지않아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페이지는 어떤 것인가. 어떤 기억을 품고 다시 태어나는 책을 만들 것인가를 생각하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돌아오는 길. 목은 칼칼하고, 허기가 졌다. 길 양쪽에 늘어선 이팝나무 흰 꽃들을 한 움큼 훑어 먹고 싶었다. 종이밥 같은 그 하얀 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