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어법 6제 / 서숙
oxumoron: 모순어법(그리스어원 oxy=예리한, moron=바보, 즉 똑똑한 바보)
세상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혼연일체에서 합종연횡으로 가는 길목, 일사분란과 논리정연에 다다르는 와중에 패러독스와 모순과 부조리의 우여곡절을 거친다. 혼돈에서 질서로, 질서에서 혼돈으로의 여행길에 잠시 들르는 놀이동산에서 롤러코스터를 탄다. 거꾸로 돌다보면 어느새 제자리, 잠시 어지럽다. 모순어법도 그 어디쯤에 자리 잡는데 일종의 반어법을 통해 강조의 방점을 찍는다. 모호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어의 애매성은 고통이지만 어휘를 뒤집어보고 뜯어보고 조립하는 언어유희의 재미가 따로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말장난을 붙잡는 사색의 간이역에서 아주 잠깐 각성이라는 이방인과도 조우할 수 있다.
심오한 무위도식
도시인의 밥벌이를 해결해주는 대부분의 직종은 사계절의 변화에 무심하다. 근면 속의 몰개성 가운데 컨베이어벨트 위의 통조림처럼 규격화와 무한반복의 규칙성, 나아가 비인격을 요구한다. 이런 생활에 지친 이들이 탈도시화를 지향한다. 자연 속에서의 건강한 노도오가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여지를 꿈꾸기 때문이다.
보던 책에서 눈을 떼고 허공을 헤매던 시선은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는다. 초점 잃은 눈이 멍청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로마의 공화주의자 마르쿠스 카토는 "인간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가장 활동적이며 철저하게 혼자 있을 때야말로 가장 고독하지 않다."라고 했다. 사유의 뜰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의미다.
평소에 왜소하기 짝이 없는 각 개인은 사색 속에서는 우주로 무한 팽창하여 스스로를 확대시킨다. 눈을 부릅뜨고 살아가는 대신에 눈을 감으면 잘 보이는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 길을 떠난다. 인간 존재의 탁월성은 그런 것이다.
공들인 지리멸렬
인사동의 갤러리 동네에는 오늘도 물감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그림들이 많이 걸려있다. 예술적 기량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지만 수준미달의 미술품들에 화랑계가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야 없다. 작가로서야 무진장 애를 쓴다지만, 아직은 습작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에 덧붙여 매정한 평가가 절로 나온다.
양산되는 책 때문에 소모되는 펄프가 아깝다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자성自省과 자조自嘲의 목소리도 크다. "냄비 받침"이라는 제목의 수필집이 있다. 자신의 저서가 그래도 냄비를 받치는 용도만큼의 효용은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어떤 수필집에서는 자평으로 '심혈을 기울인 쓰레기'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본 적이 있다. 삶의 궤적을 해석하는 지성과 주변을 감싸고 미래를 펼치는 감성으로 공감의 파장을 일으키는 것이 수필의 본령일진대 자신들의 글이 안이함에 머물러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의 목소리였다. 스스로에게 내리치는 죽비소리로 들려 신선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구태의연하고 시시콜콜하여 식상한 수필이 다반사이긴 하다. 심미적 성취라든가 허심탄회한 인생관조 등의 책으로서의 읽을 가치가 없다면 그저 종이의 낭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거기에 덧붙여 작가연然하는 지적 문화적 허영심마저 언뜻 감지되면 그야말로 구제불능, 처치곤란의 지경이 된다.
우리는 과연 예술이라는 이름을 코에 걸친 거대한 '낭비족族'들이 아닐까 반성하게 된다. 오늘도 사슴의 관을 얻어 쓴 염소는 자족감과 자괴감 사이, 우월의식과 열등의식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간다.
심각한 농담
요즘 TV 드라마에는 흔히 비극과 희극이 뒤섞여 있다. 한참 울고불고 하다가 갑자기 난센스 코미디의 설정이 펼쳐진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진중했다가 경솔했다가 일관성이 없다. 소위 막장이니 저질이니 하며 '욕하면서 보는'드라마나 퓨전 사극, 로맨틱 판타지 드라마 등속의 구성이 주는 그런 식이다. 그런데 이들 드라마들이 꽤 재미가 있다.
'말도 안 된다'고 치부하면서 왜 드라마의 추이가 궁금한가? 아마도 우리네 갈팡질팡 살아가는 모습과 매울 닮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 바로 현실이고 '말이 되는' 상황은 비현실이다. 전통극이 보여주는 사필귀정, 권선징악, 결자해지, 회자정리, 대단원 등보다는 우연의 남발, 정의롭지 못함, 억울함의 호소, 미미한 사라짐이 이 세상을 더 많이 메우고 있다.
모파상은 <여자의 일생>에서 주인공 잔느의 입을 빌려 "인생이란 그렇게 행복한 것도, 그렇게 불행한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에서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이라고 했다. 김수영은 "인환아, 너는 언제까지 그런 감상적인 시나 짓고 말거냐?"라고 그의 경박함을 질타하였다. 우리는 김수영의 치열함을 높이 우러르지만 박인환의 달콤한 허무주의가 마음이 편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속'적인 센티멘털리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지만 사실 인생은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그저 희극이면서 동시에 비극이다. 무미한 일상 속에서, 그 사실을 일깨우는 TV의 희비극들이 선사하는 눈물 한 방울과 박장대소 한바탕에 사람들이 목말라 있음에랴.
낯선 익숙함
자투리 시간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의 숙명인가. 어쩌다 가져보는 여분의 시간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다보면 현실에서 도피하여 정작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에는 소홀하게 된다. 지금 여기, 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우리의 일상이 보다 본질적으로 우리를 이루고 있는 요소다. 그 익숙함 속에서의 낯선 얼굴을 찾으려는 부단한 노정에 우리의 진실이 있다.
생활의 동력을 찾아 늘 뭔가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여행, 산, 바다…. 그런데 그 새로움이라는 것이 낯설지가 않다. 각자에게는 색다른 경험이겠으나 모아놓고 보면 대동소이하다. 오히려 전혀 새롭지 않은 것에서 낯선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귀하다.
나의 언어를 마련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진실을 전한다고 하지만 언어는 또한 지창에도 능하다. 번지르르한 언어의 성찬에 숨어있는 속임수를 찾아야 한다. 문체는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려는 노력 가운데 정작 나다움(I-ness)를 내 안에 정립해야 한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그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남의 생각, 남의 말을 흉내나 내다가 말 것이다.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대오각성의 경지에 가보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아울러 소박하더라도 나의 삶 가운데 나의 언어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자투리의 시간에서 말고.
미개한 첨단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하여 모든 불가지론과 비합리가 사라지면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요즘은 영화배우 톰 크루즈의 종교로 유명한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가 화제다. 이는 과학에 구원의 메시지가 어우러진 새로은 컬트문화라고 한다. 모든 것을 다 해명해낼 수 있다고 오만했던 과학이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초월적 미지의 신비주의를 끌어들이는 현상이 흥미롭다.
인지와 과학의 진전에 힘입어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건만 미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서울의 테헤란로는 첨단의 정보산업이 몰려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가장 성업 중인 곳은 역술인의 집들이라고 한다. 신기술을 앞세운 소위 벤처기업가들이 심심치 않게 점집을 찾는다는 사실에서 보다시피 과학과 미신 사이는 생각보다 가깝다. 둘 다 상상력에 비해 지성이 약하다는 차이점이 있다고나 할까. 아무라 과학문명이 발달해도 생명을 둘러 싼 미스터리와 우주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아직 요원하다. 지금까지의 추이로 보건대 과학만능은 또 다른 미신일 뿐이다.
한때 좋은 사주에 맞추어 출산날짜를 조절하는 것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의학의 발달과 사주라는 운명론이 결합한 것이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흘렀는데 그렇게 맞춤사주로 태어난 아이들이 사주 덕을 크게 본 것 같지는 않다. 단지 확실한 것은 과학과 미신의 결탁 속에 물불 안 가리는 인간의 무모한 욕망의 실체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비옥한 사막
인간은 오랜 세월 자아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서 마침내 개인이 우주의 중심인 세상을 만들었다. 그 대가로 잃은 것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받는 것이다. 도시는 이동성과 익명성을 보장한다. 쉽게 주거를 옮기고 어디에고 숨어들기가 용이하다. 온전한 개인으로 자립하여 군집에서 탈피한 자유로움이 있는 반면에 광장 속의 고독을 감수해야 한다. 도시의 노마다는 이동의 자유분방함과 정착의 평화로움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고 싶다. 그러나 결국 두 마리를 다 놓치고 언제나 빈손이기 십상이다. 분주함의 추억만 씁쓸하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본다. 도시 중산층의 고독, 소외, 방관자적 무심함, 적막과 허무한 분위기 등을 호퍼만큼 섬세하게 표현한 화가는 없는 듯하다. 외면적으로 풍요로움을 구가하는 도시의 외관 두에는 항상 외로운 군상들이 섬처럼 떠돌며 허기와 소외감으로 어디론가 휩쓸려가고 있다. 네온의 현란한 반짝임에 둘러싸인 사람들의 내면은 모래사막의 황량함을 닮았다. 제각각 혼자. 대화도 없고 공감도 없고 일체감도 없다. 이 풍요롭고도 삭막한 도시에서 사람들은 같이 있어도 따로따로, 언제나 홀로 먼 곳을 응시한다.
자유와 고독.
외롭다고 어렵사리 손에 넣은 이 자유를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 카잔차키스 묘비명의 구절이 일말의 해답을 준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