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생활에 관하여 정진권

-수필가 정진권 군에게

  

편지 잘 받았네수필가가 수필을 못 쓰겠다니 참 큰일이네그려그러고 보니 자네 글 읽은 지도 꽤 오래 된 것 같네잡지마다 빈번히 아름이 실리던 자네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자네의 편지 읽고문득 자네가 옛날에 쓴 글 한 편이 생각나서 찾아보았네어디 몇 줄 옮겨 볼까?

  

나의 수필은 아이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며 맛있게 저녁밥을 먹을 때 생겨나는 문학이었다친구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왕년을 자랑할 때 생겨나는 즐거운 문학이었다순수한 대화가 없으면 금방 시들고 말 이 문학은마흔을 엄어서도 함박눈을 맞으러 밖으로 뛰어나가는 사람의 문학이며인간은 그래도 아름답고 사랑할 만하다고 믿는 사람의 문학이리.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글을 쓸 무렵에도 자네는 수필을 못 써서 고민하고 있었어원고청탁서를 세 번이나 받고서도 쓰지 못하는 심경을 자네는 이제 세 번째의 청탁서를 받으매 고향에서 온 편지라도 받은 것처럼 반갑고 고맙지만그러나 고향에 갈 노자가 없어서 서울역을 서성이는 사람처럼 마음이 언짢다(같은 글)”고 했네그런데 그 후 좀 나아지더니 지금은 그 쓰지 못하는 정도가 심해진 것 같아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게.

 

그래우선 자네는 아이들과의 대화가 없어졌어다 자라서 어른이 된 아이들과 무슨 대화냐고 하지 말게다 자라서 어른이 되었어도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어도 그 아이들이 오는 날이면 자네는 맥주 몇 병 기꺼이 사다 놓고 기다렸네그런 날의 저녁 식탁은 또 얼마나 즐거웠는가잔 부딪히는 소리이야기 소리웃음소리끊임이 없었어그런데 지금의 자네는 맥주 한 병 사다 놓을 줄 몰라토막말 몇 마디뿐이야기 이을 줄도 모르고 후딱 한술 뜨고 먼저 일어나는 일은 없는가?

 

친구와의 관계는 어떤가자네는 이 친구 저 친구 불러내서 만나기를 좋아했네그리고는 자네 말대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왕년을 자랑하곤 했지다소 과장법도 써 가면서 말일세그러면 자네 친구들은 자네 말에 함께 웃고 떠들며 즐거웠네그런데 지금의 자네는 안 그래별 말 없이 잔을 기울이다가 시계나 들여다보곤 하네친구네 경조사도 그래아무리 바빠도 찾아가서 축하하고 위로하고 한잔도 하던 자네 아니었나지금은 대부분 우체국에 맡기더군.

 

함박눈이 내리면 자네는 뜰로 뛰어나가 하늘을 우러렀네무수한 나비 떼의 군무가 분방하게 펼쳐질 때 자네의 입에서는 자네도 모르는 사이에 !’ 하는 탄성이 새어나왔어자네 집 뜰에 소나기가 퍼부을 때도 자네는 뛰어나가 베란다에 섰네세찬 빗줄기가 후박나무 넓은 잎새를 경쾌하게 휘갈길 때그럴 때도 자네의 입에서는 탄성이 새어나왔어그런데 지금의 자네는 어떤가그냥 마루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눈이 오나 보다비가 오나 보다 하고 마네.

 

자네는 동네 구멍가게 김 군을 보면 요즘 장사는 잘 되느냐고 물었네우체국 집배원이 소포라도 가지고 올 때는 콜라든 우유든 한잔 먹여 보내려고 했네학문과 예술에 생애를 바치고 퇴임하는 분들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분들에게는 마음속으로나마 최고의 경의를 표했어요 얼마 전에 어느 가난한 할머니가 자기의 전 재산을 이웃 대학에 기증한 일이 있네지난날의 자네 같으면 콧날이 시큰했을 텐데그저 무심하더군.

 

맥주 서너 병 사다 놓고 아이들 기다리는 것부줏돈 몇 푼 싸들고 지하철 타는 것눈을 맞으러 뜰로 뛰어나가는 것구멍가게 청년에게 말 한마디 건네는 것사소하다면 다 사소한 것들일세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애틋한 정서가 곱게 밴 아름다운 생활이야수필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그것은 크고 찬란한 삶보다 오히려 이 작고 아름다운 생활을 실에 꿰는 작업이 아닌가 하네그렇다면 이런 생활이 없이 어떻게 수필을 쓰겠는가

 

나는 자네가 이 작고 아름다운 생활을 속히 회복하기 바라네이런 생활은 물론 그 많은 부분이 정서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자네 마음대로 금방 회복하기는 어려울지 몰라그러나 노력은 해 보게전에 우리 집에 개가 한 마리 있었네나는 개가 싫었지만 아내가 기르자고 해서 길렀네이따금이지만 나는 개 밥을 주는 일이 귀찮았어그런데 주고주고 하다 보니 그 싫던 개한테 정이 갔네그 귀찮던 밥 주는 일도 어느새 즐거운 생활이 되었고알겠는가?

 

수필가 정진권 군노력해 보게생활을 잃은 자신을 방치하지 말게자네가 자네의 생활을 회복해서 다시 수필을 쓸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설령 좋은 수필은 못 쓴다 하더라도 쓸 수 있는 것그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은가그리고 그런 생활이 있다는 것이 보다 인간적인 삶이라는 것도 알아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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