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08 (목) 12:00:00 이리나 수필가
그 짧은 물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명세서를 보여주며 두서없이 상황을 털어놓았다. 그동안 그녀는 차근차근 명세서를 읽어 나갔다.
“네가 이렇게 많은 돈을 썼다고? 가만있자, 너 이때 샌프란시스코에 간 적 없잖아. 엘에이에서 일하고 있었지.”
금액 하나하나에 내가 쓰지 않았다는 증거를 짚어주는 S의 말에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었다. 나의 상황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따져야 해결된다는 것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내가 조금 가라앉은 것을 확인한 그녀는 냉장고에서 자기가 마시려고 사둔 차가운 캔맥주 한 병을 들고 돌아왔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야. 너라고 뭐 특별할 게 있겠니?”
동갑내기 친구의 그 한마디는 큰 위로가 되었다. 거창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이런 날은 한 번쯤은 온다는 말이었다. 하긴, 나라고 뭐 특별날 이유가 있을까. 찬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경직되었던 세포가 좀 느슨해지는 듯했다. 크게 두 모금을 마셨다. 어수선하던 머릿속이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침대 끝에 앉아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서 전화하라는 듯 S가 내 손에 전화를 쥐여주었다. S의 눈을 보며 다시 카드 회사에 전화했다.
카드를 발급받은 적이 없으니, 금액을 지불할 이유가 없다고, 나는 신분 도용 피해자이니 사기 신고 부서로 연결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이때의 맥주는 그저 한 잔의 술이 아니었다. 냉혹한 현실과 맞서게 도와준 친구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이후 몇 번의 편지와 전화가 오간 끝에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한동안 모르는 카드 회사에서 편지가 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가끔 혼자의 힘으로 여지껏 살아온 줄 착각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누군가가 드러나지 않게 곁에 있었다. 힘들 때마다 다독여 준 이들과 곁에서 응원해 준 가족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지 않을까. 우분투다. 오늘따라 차가운 맥주 한 잔이 마시고 싶다.
<이리나 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