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의 독서칼럼] 바다의 긴 꽃잎
‘바다의 긴 꽃잎’ (Long Petal of the Sea)은 페루 리마에서 태어난 칠레 작가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이다. 이 소설은 허구이지만, 실제 역사적 사건과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는 베네수엘라에 망명해 있을 때 빅토르 페이 카사도에게 들은 이야기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1936년 스페인 내전으로 시작해 1994년까지 이어진다. 내전이 일어났을 때 빅토르 달마우는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전선으로 나간 그는 야전 병원에서 의사들을 돕는다. 전쟁은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들고, 이념에 매몰된 사람들은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동족끼리 벌이는 처절한 전쟁 속에서 빅토르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에게는 그 비극이 더욱 아프게 느껴진다.
내전이 끝나갈 무렵 약 50만 명의 스페인 난민이 프랑스 국경으로 몰려들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난민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다. 빅토르의 동생 기옘의 아이를 임신한 로세르 역시 이러한 도움 덕분에 무사히 아들을 출산한다.
프랑스 주재 특별 영사로 부임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는 프랑스에 몰려든 난민을 구하기 위해 ‘위니펙’호를 마련하고 약 2,000명의 난민을 칠레로 데려온다. 빅토르는 로세르와 조카를 배에 태우기 위해 그녀와 형식적인 결혼을 올린다.
책 제목인 ‘바다의 긴 꽃잎’은 시인 네루다의 시구에서 가져왔다. 네루다는 시 ‘언젠가 칠레’에서 칠레를 ‘하얗고 새까만 거품의 허리띠를 두르고 바다와 포도주와 눈으로 이루어진 기다란 꽃잎’이라고 묘사했다.
빅토르와 가족은 그렇게 칠레에 도착한다. 로세르가 낳은 아들은 동생의 혈육이지만, 빅토르의 아들로서 자라난다. 칠레에서 성장한 아이는 자연스럽게 칠레인의 정체성을 갖게 되고, 부모의 고향 말을 쓰지 않으려 한다.
가족이 칠레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던 중, 칠레에도 정치적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군부 쿠데타로 좌파 정부가 무너지며 아옌데 대통령이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인 네루다도 세상을 떠난다. 빅토르는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간신히 풀려나 베네수엘라로 망명한다. 그곳에서 빅토르는 안정적으로 정착하여 부족함 없이 살았지만, 이방인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하자 빅토르와 로세르는 고향으로 향한다. 동생이 숨을 거둔 곳을 찾아가 보지만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오랜만에 찾아간 고향은 더 이상 기억 속의 그곳이 아니었다.
고향 스페인에 다시 적응하기 어려웠던 그들은 결국 칠레로 돌아온다. 칠레는 겉으로는 번창했으나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져 있었다. 빅토르는 좌우 양쪽에서 비난받았다. 좌파는 왜 끝까지 싸우지 않고 베네수엘라로 떠났느냐고 질타했고, 우파는 그를 공산주의자라며 경계했다. 빅토르는 칠레의 가난한 동네를 찾아가 의료 봉사를 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칠레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17년 만에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빅토르는 사회적으로 안정된 삶을 되찾고 명성도 얻는다. 빅토르가 일흔세 살이 되었을 때 아내 로세르는 말기 암 진단을 받는다. 로세르는 끝까지 의연하게 투병하다 제2의 고향인 칠레에서 눈을 감는다. 비록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녀는 떠밀려 간 삶의 터전에서도 당당하게 운명을 개척해 나간 인물이었다.
빅토르 역시 스페인에서 칠레로, 다시 베네수엘라로 떠돌며 역사의 거센 물결에 휩쓸렸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스페인 내전부터 지금까지 그 어느 것도 내가 선택한 것은 없다. 그냥 나에게 닥쳤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그의 삶은 항해의 연속이었다. 이 땅 저 땅을 떠돌았고 그의 영혼도 함께 방황했다.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이방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기나긴 항해 동안 그를 끝내 지탱해 준 것은 사람이었고, 그가 깨달은 가장 큰 가치는 사랑이었다.
‘바다의 긴 꽃잎’은 한 나라의 역사를 넘어, 뿌리를 잃고 떠돌면서도 다시 삶의 터전을 일구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격동의 세월을 지나 이민자로 살아온 우리에게 그들의 방황과 정착은 더욱 깊이 마음에 와닿는다.
책을 덮으며 지나간 날들을 돌아본다. 긴 세월이었는데 한순간인 듯도 하다.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그 길에서 내게 사랑을 건네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영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