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시시피강 풍경.
美 조지아 사바나를 떠나 테네시로 오자, 자연환경이 달라졌다. 도시에서 큰 건물만 보다가 갑자기 펼쳐진 시원한 들을 보자 가슴이 탁 였다.
2024년 가을,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테네시 포트 캠벨(Fort Campbell)에 있는 한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포트 캠벨은 제2차 세계대전, 월남전, 아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에 참전한 유명한 군부대가 있는 도시로, 내쉬빌(Nashville)에서 약 한 시간 정도 거리였다.
교인들은 대부분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미국인과 그 아내들로 구성돼 있었다. 교회는 크지 않았지만 교인들은 매우 성실하고 친절했다. 한 주간 집회를 마치자 교인 중 한 명인 폴(Paul) 부부가 켄터키 윌리엄스 타운에 있는 ‘노아의 방주(Ark Encounter)’을 보여주겠다며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미국 퇴역 군인이 직접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싣고 여행에 나섰다.
시내를 벗어나자 넓은 들이 나타났다. 옥수수밭이었다. 옥수수밭은 한국이나 아프리카에서 많이 보았지만, 여기는 스케일부터 달랐다. 말로만 듣던 미국의 대평온이 얼마나 넓은지 나는 한동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대평원은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이제 막 가을걷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차가 켄터키주로 진입했다는 팻말을 보자, 어릴 때 배운 노래가 떠올랐다. ‘켄터키 옛집(My Old Kentucky Home)’이라는 노래다.
켄터키 옛집에 햇빛 비치어 여름날 검둥이 시절
저 새는 긴 날을 노래 부를 때 옥수수는 벌써 익었다
마루를 구르며 노는 어린 것 세상을 모르고 노나
어려운 시절이 닥쳐 오리니 쉬어라 켄터키 옛집
잘 쉬어라 쉬어, 울지 말고 쉬어
그리운 저 켄터키 옛집 위하여 머나먼 집 노래를 부르네

▲내쉬빌에서 만난 폴.
이 노래 역시 초등학교 때 선생님에게 풍금 옆에서 배웠다. 어릴 때 이 노래를 부르며, 나는 얼마나 흑인 노예들이 일하던 미국 옥수수밭을 상상했던가? 세월이 지나 내가 그 무르익은 옥수수밭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가는 길에 과거 노예농장이던 Barkley Plantation를 지났다. 당시 이곳은 Mason Barkley라는 농장주가 운영했던 농장이었다. 1840년대 중반에 살았던 그는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200에이커의 땅에 대마(hemp), 밀, 호밀, 옥수수, 귀리 등을 재배했다.
이곳이 중요한 것은 당시 노예들의 삶을 볼 수 있는 고고학 발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것은 주인이 살던 본채와 별채 부엌, 노예들이 살던 집과 창고였다. 노예들이 살던 집은 지금도 농장 주변에 남아 있었다. 낡고 좁은 그 집에서 그 많은 노예 식구들이 서로 살을 비비며 옹색하게 살았을 것이다.
뜻밖에 이곳에서 발견된 것은 아프리카 조상들의 신상이었다. 고향을 떠나 있으면서도 그들은 조상들이 믿었던 신앙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농장주들이 믿었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 그들에게 기독교는 어떤 종교였을까? 종교의 신상뿐 아니라 여러 악기들도 발굴됐다. 벤죠라고 불리는 악기가 그 중 하나다.

▲노예제도가 존재하던 미국 남부 지역 지도.
‘오 수재너(Oh! Susanna)’에 나오는 가사와 같다. ‘벤죠를 메고 나는 너를 찾아 왔노라’. 이것은 아프리카인들이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노래와 춤과 공동체적 문화를 잊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타고난 아프리카의 음악적 감수성이 훗날 미국 현대 음악, 곧 솔, 재즈, 가스펠, R&B, Funk, Rock & Roll, 그리고 Hip-Hop, Rap등의 출현에 영향을 줬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이, 자기들의 흑역사라고 자료를 남겨놓지 않을 리 없다. 남부 지역 각 주마다 노예제도에 대한 많은 자료를 남겨 놓았지만, 가장 중요한 자료는 미국 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에 있는 ‘Born in Slavery: Slave Narratives’란 자료다.
1936-1938년, 미국 정부는 살아남은 노예 혹은 그들의 후손을 인터뷰해 2,300건이 넘는 증언과 약 500장 이상의 사진을 남겼다.
자료에 의하면, 아프리카 노예들은 매일 노동을 하며 살았다. 그들은 농장에서 목화, 담배, 옥수수 등의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그것도 해뜨기 전부터 시작해 해질 때까지 일했다. 남자는 밭일, 벌목, 축산, 운반 등을 했고, 여성도 농사와 함께 집안일을 담당했다. 아이들도 어린 나이부터 노동에 참여했다.
노예는 법적으로 개인 재산으로 취급됐기 때문에, 부모와 자녀가 서로 다른 사람에게 팔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자료에 따르면 남북전쟁 이전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약 100만 명 이상의 노예가 사고 팔렸으며, 그중 절반 이상의 부모와 자녀가 서로 헤어졌다.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팔려온 것도 슬프지만, 더 슬픈 것은 미국 안에서 다시 가족과 헤어지는 것이었다. 대부분 흑인들의 노래는 이 가족과의 슬픈 이별 때문에 생겼다. 채찍질, 구타, 가족 분리, 강제 노동은 노예의 일반적 통제 수단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아프리카 노예들은 다음과 같이 살고 있었다. “노예로 팔려온 그들은 대부분 농장에서 힘들게 일했다. 그들은 날이 밝으면 밖에 나가 뙤약볕에서 일했고 저녁이 되면 휘청거리며 돌아왔다. 이들은 대부분 난방 시설이 없는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고 한방에 다섯 명이나 열 명이 함께 살았다.
남부 식민지 법들은 대부분 이들의 결혼, 재산 소유, 자유 등을 불법으로 간주했고, 심지어 교육도 받지 못하게 했다. 주인들은 노예들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 심한 벌을 줬고, 그 가운데는 구타, 굶기기 등이 있었고 심한 경우 그들을 목매달아 죽이거나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였다.”
폴이 모는 차가 켄터키 넓은 평원을 질주하고 있을 때 나는 창밖에 펼쳐진 또 하나의 장관을 보았다. 그것은 목화밭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목화밭은 마치 한겨울에 내린 흰눈처럼 온 천지를 덮고 있었다. 중간 중간 옛날 노예들이 살던 집들이 남아 있었다.
허물어지기 직전의 작고 낡은 옛집, 마침 주변에 흑인 가족이 있어 사진 한 장을 같이 찍자고 했다. 한때 노예를 부리던 백인과 한때 노예였던 흑인 가족이 햇빛 비치는 켄터키 옛집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켄터키 옛집에서 만난 백인과 흑인, 그리고 우리(황인)는 켄터키 옛 집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미시시피강 풍경.
돌아오는 길에 미시시피 강을 지났다. 잔잔한 강을 가로지르는 낡은 철도를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것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연이 아름다워도 거기 사는 사람이 아름답지 않으면 자연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이 아름다운 나라가 되려면 자연 때문이 아니라, 그 땅에서 눈물과 노동으로 희생한 아프리카 노예들을 기억하고 회개하고 감사하기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미국에서 자행된 슬픈 노예들의 역사 때문에, 미국은 트럼프가 말하듯 ‘Great America again’이라고 외쳐서는 안 된다.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아프리카 노예들을 학대한 두 가지 큰 원죄를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안정과 부는 노예들의 피땀 흘린 희생의 대가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우리만 잘 살겠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미국은 다른 인종,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빚진 자로 살아야 한다. 특히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유색인종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테네시, 켄터키, 미시시피를 떠나면서 사람이 힘으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성과 존엄성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교회는 복음을 전하면서, 어떻게 인간 존엄성까지 지킬 수 있을까를 물었다.
그리고 인류는 앞으로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자유를 지킬 것이며 우리는 어떻게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까를 생각했다. 자유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기 때문이다.![]()
이윤재 선교사
우간다 VMC(Victoria Mission College)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