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희의 삶과 문학/수필과비평/2005.9.10월호/조경희추모 특집
월당(月當) 조경희(趙敬姬)의 삶과 문학
최원현/수필문학가. 칼럼니스트
  http://essaykorea.net 
 
그리움의 꽃 한 다발을 들고 - 월당(月當) 조경희(趙敬姬)의 삶
 삶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빼면 뭐가 남을까. 삶의 대부분은 바로 만남과 헤어짐이다.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만남과 헤어짐은 수없이 이뤄진다. 그런데 헤어짐 후에 그리움이 크게 남는다면 그 만남은 행복이고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그리움이란 헤어짐보단 만남에서 풍겨나는 향기이다. 향기는 아주 가까이서 보다 조금 떨어져 있을 때 그의 진수를 알게 된다. 이 시간 나는 내가 안을 수 있는 가장 큰 그리움의 꽃다발을 든다.
 한국 수필문단의 어머니였던 조경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이 2005년 8월 5일 1시 50분 우리의 곁을 떠나셨다. 늘 커렁커렁한 목소리로 장내를 압도하던 그 힘을 어디 가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고려대병원 영안실, 마지막 모습을 뵈면서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제2회 해외한국수필문학상 시상식이 있던 얼마 전에도 몸은 많이 약해 지셨으나 그토록 청청한 목소리로 축사를 하셨는데 아주 먼 곳으로의 여행을 위해 마지막 단장을 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며 불경스럽게도 가시는 안타까움보다 당신께서 이만큼 올려놓으신 한국수필문학 35년에 먼저 감사를 했다. 
 조경희! 어쩌면 한국수필의 대명사였다. 그에게선 어디서든 수필 냄새가 났다. 화려한 많은 어떤 경력이나 직함도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직만큼 더 어울릴 수는 없었다.
  
  그는 1918년 일찍이 개화한 강화읍 온수리의 성공회 집안에서 태어났다.  1939년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하고 바로 조선일보사에 입사한 그는 재학시절인 1938년 잡지『한글』에 수필 <측간단상>(廁間斷想)이 당선되어 등단을 했다. 그는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40년 8월 일제가 조선일보를 강제 폐간하자 매일신보로 옮겼다가 광복 후 서울신문을 거쳐 1980년 한국일보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두꺼비 여기자’로 40년간을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1974년부터는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79년에는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및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과 이사장 권한대행을 했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1984년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의 회장이 되어 연임까지 했다. 
 1988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여성 정책을 전담하는 정무제2장관실을 신설하자 그 초대 정무2장관에 취임했는데 명쾌한 논리와 남다른 추진력을 보이면서 장관 취임 후 1년 동안 전국 13개 시·도의 여성 가정복지과장을 모두 국장으로 승진 발령하여 화제를 모으는가 하면 가장 인기있는 장관으로 뽑히기도 했다. 장관에서 물러나 예술의 전당 이사장을 지냈으며, 세상을 떠나시는 날까지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과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셨던 그는 청조근정훈장, 프랑스 문화훈장, 은관문화훈장 등 훈장과 한국문학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한국수필대상 등을 수상하셨지만 2005년 9월 7일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을 앞두고 가시고 말았다. 가시는 날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정열적으로 일을 하신 분이다. 
  1980년 한국일보에서 정년퇴임하기까지 40년의 삶을 한국여성 언론인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는 문화예술계 대모라는 호칭만큼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 예총회장 재임시는 예술인의 일터인 예총회관을 마련했고, 예술인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작품을 발표 할 수 있는 잡지 『예술계』를 창간했다.  
  1989년 예술의 전당 이사장 취임당시에는 노조 활동이 극심하였으나 노사간의 대화와 이해로써 원만한 운영을 기했다는 정평이며 그 당시 한가람미술관 개관 시에는 한국화단의 화가 500인 전을 개최하였고 워싱턴에 있는 국립여성미술관에 우리나라 여성 작품만 없는 것을 통탄하여 한국여성 화가 10인 전을 여는 등 혼신의 정력을 기울였다.
 오페라하우스를 완공하는데 있어서 예산책정이 어려워 기일 내 완공이 어려운 사정이었으나 예산 500억을 끌어내는 활동을 벌여 오늘과 같은 세계적인  오페라 하우스를 마련하고 세계유명 오페라 심포니 등의 내한 공연을 하게 되어 한국음악의 수준을 세계적인 레벨로 이끌어 올렸다.
   그 뿐만 아니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국제 펜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해서 한국의 문학과 예술을 세계에 소개하였고 한국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조경희 선생의 업적 중 업적은 ‘한국수필가협회’일 것이다. 선생은 1971년 한국수필문학의 저변을 확대하고 예술문화의 순수한 창작정신을 작가의 기본이념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한국수필가협회를 창립하여 현재 800명의 수필가 회원들이 있다. 그는 수필문학의 사회문화적 토양을 배태시키기 위하여 <수필문예> 및 격월간〈한국수필〉발행인으로 통권135호를 발행했다. 
  또한 한국수필가협회는 2005년 현재 제24회에 걸친 국내세미나 및 제11회 해외세미나를 개최하여 우리언어의 세계화에 기여했으며, 그 동안 매년 한국수필문학상 시상식 및 해외한국수필문학상 시상식을 개최하여 명실공히 한국수필문학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해 왔다.
  수필을 사랑해서라고 하지만 이만한 열정으로 수필 인구의 저변 확대와 창작 및 발표 공간, 수필가의 위상 정립 등 수필에 관한 전 부문에 걸쳐 희생적 사명감으로 수필 전도사가 되어 애써 오셨던 것을 생각하면 한국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해 가장 크게 공헌하신 분이 아닐까싶다. 
  더욱이 뜻이 있다 해도 실천이 따라줄 수 없는 시대에 보란 듯 이만큼 위치를 확고히 해 놓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화려한 경력이 받침 되었을 테니 월당 선생이 아니고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들이었다. 
   1971년 2월 12일 종로2가 낙원장에서의 창립총회에서 한국수필가협회의 초대 회장이 된 후 35년간 한국수필문학을 위해 애써 오신 그의 수필 사랑은 이제 모든 이들의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랑의 큰 빚이 된다.
  
 조경희의 문학
  
  월당 조경희 문학은 오로지 수필이다. 그의 수필은 그대로 간단없는 그의 삶의 이야기다. 만들고 다듬고 할 것도 없이 그냥 평상시에 말 하던 것처럼 들려주는 목소리 그대로다. 1938년 <한글>지에 수필 <측간단상>(廁間斷想)이 당선되면서 맺은 수필과의 인연이 무려 70여년이다. 그간 10권의 수필집(선집 포함)에 자서전이 한 권이다. 
   월당의 수필은 ‘주로 인간애를 불러일으키는 휴머니티에 바탕을 두고 그로부터 생활인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형상화 시키는데 그 특징이 있다.’(윤병로) 
 그렇다.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것 같은 자잘한 일상의 이야기들-그러나 다른 사람에겐 그의 화려한 경력만큼 다양하고 특별한 이야기일 수 있다-을 그냥 빙 둘러앉아 한담을 나누듯 스스럼없고 거침없이 생각과 느낌, 그리고 겪었던 일들을 가감 없이 풀어놓고 있다.
  교과서에 실려서 그의 대표작이 되어버린 수필 <얼굴>을 보면 
  “ ‘왜 당신은 그렇게 못났소?’ 하고 놀려대는 일이 있어도 나는 태연자약 할 수 있는 기품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했는데 남자도 아닌 여자가 아무리 남이 못 났다고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못났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월당의 수필을 보면 그런 그의 인품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오히려 적나라하게 인정하면서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 ‘즉 사람은 외양의 아름다움보다도 마음이 고와야 하느니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다분히 진리와 진실을 품고 있었다.’라고 뛰어 넘어버린다. 거기다 ‘미인박명’이란 말로 쐐기를 박는다. 그래서 그의 수필은 아름답다기 보다는 통쾌하고 후련하다. 
  그러나 조경희의 작품들을 보면 강해 보이는 내면 깊이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여린 부분이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수필 <내가 부러워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소박한 것을 소망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그는 영성채를 받으러 사제 앞으로 함께 걸어가는 젊은 부부의 모습을 성스러울 정도로 부러워하고, 세계여행을 다니고 있는 노부부를 보며 그 다정함을 못내 부러워하는 지극히 평범하면서 작고 소박한 것을 갈망하는 어쩔 수 없는 한 여인이다. 그런 마음의 조경희 수필들은 어렵지가 않다. 늘 따뜻하고 다정다감하여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듯, 공원의 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담소하는 것 같은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받곤 한다. 그의 수필은 평범하고, 소박하고 맑고 깨끗함에 대한 동경이다. 
  시나 소설을 쓴 것 보다 수필 한 편을 쓰는 것이 쉽거나 가볍지 않다는 것은 수필 쓰는 사람들은 다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수필이 타 장르에 우월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재의 다양성과 깊이 있는 삶의 체험이 소재가 되어야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고 그래야 사랑도 받게 된다. 
  선생의 수필쓰기는 그 점을 중시한다. 수필에서 문장력은 기본이어야 한다. 주제를 어떻게 객관화시켜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에 대해 보다 고심해야 한다. 선생은 수필이 지나치게 개인적인 글이 되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고향이나 가족 이야기를 하게 되면 더욱 조심스러웠다. 
  <하얀 꽃들>은 그런 선생의 글쓰기에 대한 뜻이 잘 반영된 수필이다. 그가 하얀 색에 애정을 갖는 이유는 뭘까. 하얀 색은 청결 순수 통일감을 준다. 그런데 조경희는 하얀 것에서 다른 것을 찾는다. 바로 향기다. 그리고 쓰임이다. 하얀 것일수록 향기가 진하다는 것이다. 아카시아꽃, 정향(丁香), 찔레꽃, 치자꽃은 찬란한 것을 자랑하지 않는 대신 향기가 일품이라는 것이다. ‘하얀 꽃 치고 향기롭지 않은 꽃은 없다.’고 단언한다. 사실 백합의 향기, 마틴이나 소주 같은 술의 향기처럼 흰 색의 향기는 사람을 끈다. 그런데 여기서 조경희는 바로 인간에게 그런 향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 깨끗하고 소박한 향기를 품은 생각의 글을 써야 한다고 한다. 목화의 아름다움은 ‘인간을 위해서 유익한 결실을 맺는데’ 있는 것처럼 사람도 사람의 향기, 사람다운 향기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삼라만상이 자연이다. 사람도 꽃도 자연이다. 그런데 다 같이 자연으로 하나여야 하는데 유독 그렇지 못 한 것이 인간이다. 
  ‘꽃은 자연이요, 자연은 곧 우리들의 생활과 연속 된다. 하얀 꽃 같은 소박한 사람의 청아한 모습이란 우리들 눈시울 속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꿈이요, 그리움이다. 하얀 꽃 같은 친구가 그립다.“ 
  조경희의 바람, 고뇌, 아픔이 거기에 있다. 그의 눈에는 그런 안타까움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경희 문학 또 하나의 화두는 끊임없는 사유의 자기 성찰과 반성이다.
 ‘그러나 오늘도 나는 여름 날 베어다 쌓아논 잡초처럼 아무 일도 해결하지 못하고 누렇게 떠가는 인생이 있는 것을 안다.’(<소나기> 중)
 ‘나는 구두를 아끼는 마음에 마른데만 골라 디딘다고 애를 써도 뜻하지 않은 진흙구덩이를 헛밟는 수가 있다. 마른 데를 조심조심 골라 디디려는 마음과는 반대로 진 데를 디디고 마는 것 같은 인생을 안다.’(<구두> 중)
‘푸근하고 오래 앉아있어도 권태가 나지 않고 편안한 자기에게 알맞은 의자를 만들어 내기는 과히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일생을 두고 이와 같이 어울리는 꿈의 의자 이상의 의자란 좀처럼 만들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다.’(<의자 고> 중)
 조경희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능력에 관계없이 부단히 아이디어를 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열고자 한다. 그의 가장 큰 재산이 바로 그렇게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삶에 대하여 늘 점검하고 반성하고 개선해 가는 결단력과 추진력이다. 
  자기 성찰은 겸손이다. 높아질수록 낮아지는 자세, 그래야 남이 못 보는 것을 보고,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남이 생각지 못 하는 것을 생각한다. 그는 삶의 매 순간을 철저히 사랑했다. 살아있다는 기쁨을 만끽한다. 조경희에게 살아있다는 것은 일한다는 의미요, 일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도와 개선과 창조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기쁨이었다.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슬픔이었다.'라고 선생은 자신을 성찰하고 그런 자성을 통해 다시 자신과의 선한 싸움을 쉬지 않는 열정과 불꽃같은 삶으로 타오를 수 있도록 자신을 채찍질 하곤 했다.
  13살에 떠나온 고향 강화, 설과 추석에 겨우 성묘나 갈 정도이지만 추억의 뿌리만큼은 늘 그곳 고향에 두고 그리움을 키웠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내면 깊이엔 기대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바람이 가득 고여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에선 어디서도 그런 걸 발견할 수 없다.
  그는 24시간을 조금의 허실 없이 나눠 쓴다.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초청장 등 전날의 우편물들을 정리하고 일정표를 새로 짜거나 조정하는 것으로 새벽의 한 시간을 쓰고, 남은 시간은 글을 쓰거나 아침 준비를 한다는 선생이셨다. 그 연세에, 그 지위에도 파출부 하나 없이 손수 모든 것을 다 해 내셨다. 그래서 선생의 수필은 가식 없는 성품만큼이나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하얀 꽃들> <얼굴> <구두> <재떨이> <소나기> 등은 선생이 특히 애정을 갖는 작품들이다. 
  선생은 다양하고 화려한 경력이 소재가 된 폭넓은 수필들을 많이 쓰셨다. 그것이 선생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의 어떤 수필에서도 권위를 느끼게 하는 것은 없을 만큼 소박하고, 글을 꾸미거나 의도적으로 쓰신 것이 아닌 생활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따뜻한 가슴으로 보듬는 마음과 생각을 담은 글들이다. 그래서 조경희의 수필에선 향기가 짙다. 평범한 언어로 빚은 야산의 들꽃 같은 소박한 향내가 난다.
  글이란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창작물이 아니라 그 자신의 생활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원해 나온 삶의 목소리다. 그래서 수필은 빚어낸다는 표현을 쓴다. 넘쳐흐르는 충만의 상태, 수필은 그래서 억지 부리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고 드러나는 것들이다. 더러는 자기상실을 극복하기 위한 생활의 부분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 위안과 자기 성찰로서 작가 자신에게 우선 진실하고자 하여 이러한 진솔함이 독자들로 하여금 작가와 독자의 삶의 진실로 자연스럽게 동감하게 한다.
 조경희의 수필에선 언제나 봄날 같은 안온함이 느껴진다. 그의 눈은 긍정적이고 생산적이다. 삶의 순간순간인 일상생활 자체를 지극히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서민들 삶의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그의 인간미의 세계도 그 행위 속에 이미 인간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기에 작품마다에선 그런 보편적 애정이 진득하게 녹아 넘친다. 그의 긍정적 세계관은 기독교의 교리에 기초한 인생관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의 천성이다. 날카로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지닌 그만의 사랑법으로 당당히 시대의 변화 속을 걸어가면서 모든 이에게 큰 형님 같고 큰 누님 같은 여유의 어른스러움으로 세상을 걸어가며 무엇이 옳고 그른 지보다 그 시점에서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인지를 판단해 내는 합리적이고 냉철한 지성으로 빛난다.
  그의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도 소박하다. 그가 그의 생활을 창조해 내는 작은 창조의 권한을 위임받은 소명감으로 주어진 생활에 최선을 다하며 무언가를 이루어 내는 성공자로서 생활의 희열을 강조한다. 그것은 남성적 직설성이요 당당함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는 중대한 결정 앞에서 매사를 긍정으로 놓고 부정과 싸워 긍정의 세계에 도달하는 그의 정신력은 ‘나’라는 세계의 문을 열어 보다 큰 세상을 담는 큰 그릇의 삶으로 펼쳐내는 조경희식 삶의 방식 곧 그가 세상을 향하는 사랑학인 것이다. 
  그의 수필은 현란한 수사를 피하고 삶을 애정으로 포용하며 자기 주변 세계를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함을 보인다. 너무 직설적이다 싶은 표현까지도 꾸밈없는 투명함으로 오히려 일상 속에 숨겨진 삶의 진실과 만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조경희의 삶이고 문학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수필이란 그냥 그대로 삶이다.
큰 아쉬움으로
 큰 별이 졌다. 하늘이 텅 빈 것 같다. 그러나 그 별은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긴 것뿐이다. 조경희란 큰 별은 이 땅에 사는 우리 그리고 문학을 사랑하는 우리 후세들의 가슴 가슴마다에 꼭 그들 가슴만 한 크기의 작은 빛들로 나누어 채워져 그들마다의 가슴에서 영원히 살아있게 될 것이다.
  그의 수필이, 그의 삶만큼의 열정과 사랑이, 그리고 그의 이름만큼 남겨질 그리움들이 남아있는 자에게서 빛으로 향기로 여운으로 살아있을 것이다.
  만나면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 속에서 그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떠나면서까지 크고 아름다운 선물들을 무진장 뿌려주고 떠났다. 
  이제 얼마 있으면 그의 고향 강화엔 조경희 문학관이 세워진다고 한다. 여느 문학관과는 다른, 그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자료들로 가득한 곳이 되어서 그를 아는 더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삶, 긍정적으로 사는 삶, 마지막 빛까지 소멸해 버리는 전력질주의 삶, 그의 삶은 그렇게 우리의 가슴에 심겨져 문학으로, 여타 여러 예술로, 실생활의 감동과 교훈으로 더욱 오래도록 빛이 날 것이다. 그는 그렇게 그리움으로 우리 곁에 살아있을 것이다.



최원현  http://essaykorea.net. http://cwh1.kll.co.kr
한국문인협회. 수필문우회 회원.. 국제펜클럽 심의위원. 한국수필가협회 감사.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강남문인협회 상임이사. 한국수필. 수필세계. 문예춘추. 문학나무 및 월간 건강과 생명 편집위원. 제5회 허균문학상, 제1회 서울문예상. 제20회 한국수필문학상. 제20회 동포문학상 대상. 제23회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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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희 선생님 대표작
1. 음치의 자장가
2. 얼굴
3. 낙엽의 침묵
4. 골목
5.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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