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는 끝이 없다. 한자어로 ‘학무지경’(學無止境)이라고 한다. 남송(南宋)의 대신 장구성(張九成)은 강직하고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힘써 일했고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다. 궁궐 내에서 권력투쟁이나 일삼고 암암리에 농간을 부리는 소인배들을 몹시 미워했다. 늘 바른 말을 했다. 그러다가 실권을 쥐고 있던 간신 진회(秦檜)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쫓겨나 남안군(南安郡)으로 유배되었다,
몸은 멀리 쫓겨났으나 반드시 조정에 돌아가 충성을 다하리라 확신했다. 그 생각에 매일 날이 밝자마자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 책에 빠져 있다 보니 밥 먹을 때도 아내가 여러 번 독촉한 후에야 비로소 식사를 했다. 한번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아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얼마 안 있으면 오십이 될 양반이, 조정에 있는 것도 아닌데 책은 읽어 뭐하시게요?” 그러자 장구성은 “배움에는 끝이 없고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소. 장차 폐하께 충성을 다하고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자면 배움이 없이 어찌 큰 그릇이 될 수 있겠소?”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쉼 없이 공부했으나 결코 해이해지거나 나태해지지 않았다. 마침내 장구성은 다시 조정에 돌아왔다. 그를 만난 대신들은 그의 학문이 전보다 크게 진보했고 박학다재함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나 어려운 역경에 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큰 성취를 이룬 사람들은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이를 자신에 대한 채찍질로 여겨 더욱 정진한다.
어려움과 역경 앞에서 하늘을 탓하고 사회를 탓하며 남을 탓하는 사람은 스스로 역경을 인정하고 그것에 굴복하는 것이 된다. 역경 앞에서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찾아 보완할 수 있는 사람만이 역경을 넘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맹자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하늘이 누군가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기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들의 근육을 수고스럽게 하며, 그들의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 몸에 가진 것이 없게 해서 그들이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게 한다. 이는 마음을 분발하게 하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함이다. 사람은 대체로 잘못을 범한 뒤라야 고칠 수 있고, 번민과 고뇌가 얼굴과 목소리에 나타난 뒤라야 해결 방법을 깨닫게 된다.”
어떤 어려움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용감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용맹정진이라고 한다. 조선 중기 권상하(權尙夏) 선생은 그의 제자 윤노동(尹魯東)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평생 간직할 말씀을 청했을 때 ‘용맹분발’이라는 네 글자를 화두(話頭)로 전하였다.
“學不進은 率由於因循이라! (그대가 배움에 진전이 없는 것은 결국 그대의 옛 습관에 젖어 새로운 전기를 못 만들어서이다!) 須勇猛奮發하라! (모름지기 용맹분발 하라!) 必以聖賢爲表準하고 毋或退轉이라! (반드시 위대한 성현이 되겠다는 꿈을 확고히 표준으로 세워 한 치도 뒤로 돌아서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시인 류시화씨가 인도 바라나시를 방문하여 한 여인숙에서 묵고 있을 때다. 낮에 이곳저곳 구경하고 돌아오면 늙은 여인숙 주인이 류씨에게 물었다. “오늘은 뭘 배웠소?” 그는 여행을 하러온 류씨에게 ‘오늘은 뭘 구경했소?’라고 묻지 않고 항상 그렇게 물었다.
류씨는 질문에 대답하기 싫어서 못들은 척 하려고 하다가 아무렇게나 둘러대었다. “오늘은 인도가 무척 지저분하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는 류씨의 말에 흥미를 가지고 심부름 하는 아이를 불러서 말한다. “이 손님이 오늘 인도가 무척 지저분하다는 것을 배웠다는구나.” 그러니 그 아이도 덩달아서 “그래요? 그런 걸 배웠대요?” 라고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다음날 주인은 또 물었다. “오늘은 뭘 배웠소?” 류씨는 또 아무거나 둘러 대었다. “오늘은 인도에 거지가 무척 많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는 “그래요 그런 걸 배웠어요?” 그래서 류씨는 자기를 놀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복수하기로 작정했다.
그 다음날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오늘은 인도에 쓸데없는 걸 묻는 사람이 참 많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러자 여인숙 주인은 정색을 하며 물었다. “누가 그런 쓸 데 없는 걸 묻던가요?” 대답을 안 하고 들어가는 류시화씨를 보고 주인이 심부름 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저 손님이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는구나!” 결국 그 여인숙 주인은 류시화씨에게는 아주 좋은 스승이었다고 고백을 하였다.
“오늘은 내가 뭘 배웠지?” 한 번 되돌아보면 어떨까? 공부는 하는 이의 마음 정도에 따라 평범한 글이라도 소중한 법설(法說)이 되기도 하고, 애를 써서 한 공부도 범상(凡常)한 글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이는 먼저 돈독(敦篤)한 신성(信誠)과 극진한 공경(恭敬)을 바치고 무조건 봉대(奉戴)하는 심경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야 그 공부가 깊이 감명(感銘)되어 잊혀지지 않고 실지 경계에 활용되어 실다운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학무지경! 배움에는 끝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