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 / 이국환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란 말은 실체가 없다. 출판이나 서점 종사자들은 가을에 책이 잘 팔렸던 적이 없었다 하고, 사서들은 가을철 도서관 책 대출이 다른 계절에 비해 많지 않다고 한다. 가을에 눈에 띄는 건, 각종 단체가 주최한 독서 관련 행사뿐, 나부끼는 구호에 이끌려 정작 책을 읽는 사람은 드물다. 출판계의 오랜 금언 '읽는 사람이 읽는다'는 계절과 상관없이 결국 독서가 습관임을 말해준다.

선진국들과 비교해 우리나라 독서문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린다. 우리의 독서문화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는 신흥 사대부 계층이 등장한 고려 말과 조선 초라할 수 있다. 박지원이 '독서를 하면 사(士)요,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선비의 주업은 독서였고, 독서를 통해 덕과 학식을 쌓다 기회가 되면 정치에 종사했다. 이때 선비에게 독서는 곧 공부였고, 의무이자 특권이었다.

다스리는 자 역시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왕은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신하와 강독을 하였는데, 조강 주강 석강이라 하여 아침 낮 저녁 세 번씩 행하였다. 세자 역시 서연이라 하여 유가서와 역사서를 중심으로 독서에 매진했는데, 여름에는 방학하고 날씨가 선선해지는 가을부터 다시 시작했다.

독서를 좋아했던 세종은 신하들에게도 독서를 권장했으며, 유능하고 젊은 인재들을 선발하여 집이나 사찰에서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휴가를 주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제도화하였다. 성종은 사가독서를 더욱 발전시켜 문신들이 업무에서 벗어나 오직 독서에 열중하도록 독서당을 마련해주었는데 오늘날로 보면 도서관에 해당한다. 하지만 독서당은 임금이 지명한 문관만이 이용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 왕이 직접 주연을 베푸는 등 여러 특혜를 주었기에 독서당에 들어가는 자체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나이와 직업, 성별과 상관없이 차별받지 않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지역 공공도서관은 보배 같은 존재다. 도서관은 냉난방이 잘 되어 쾌적하게 책을 읽을 수 있고, 집에 가서 더 읽고 싶은 책은 빌리면 된다. 필요한 책이 없으면 상호대차 서비스를 활용해 다른 도서관에 있는 책을 빌리고, 신간 도서가 읽고 싶으면 사서에게 신청하면 된다. 인터넷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고, 무엇보다 대부분 서비스가 무료이기에 돈 쓸 일이 없다.

지식정보사회에서 지식과 정보가 경쟁력이라면 차별 없이 누구나 원하는 사람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공공도서관이야말로 복지의 일선이다.

 

얼마 전 도서관 열람실에서 책을 읽다 맞은편에서 독서에 열중하는 분을 만났다. 귀밑머리가 하얗고, 60대쯤 되어 보이는 노신사였다. 2층 열람실 책장 옆에 놓인 좌석은 한산하여 나와 그분만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매번 마주 앉아 책을 읽다 자연스럽게 친숙해졌고 가끔 휴게실에서 대화도 나누게 되었다. 그분은 은퇴 후 무료한 나날을 보내다, 어릴 때 책 읽기를 좋아했던 기억이 떠올라 도서관에 왔다고 한다. 독서가 이렇게 재밌는지 알았다면, 젊은 시절부터 도서관을 자주 이용했을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분은 처음 두서없이 관심사에 따라 읽었으나 나중에는 주제를 정하고 관련 책을 모아 읽는, '주제 중심 독서'를 스스로 익힌 듯했다. 첫 주제는 '나이 듦'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서 노화가 실감 나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도서관에 다니면서 나이 들어가는 것의 의미에 관한 책을 고전 철학책부터 최근 출간된 뇌과학책까지 두루 읽고 더는 우울하지 않았다며, 폴 투르니에의 '노년의 의미'란 책을 권했다. 요즘 관심은 정치라고 했다. 플라톤 사마천 공자 맹자의 책을 두루 읽다 보니 문리가 트인다며 해맑게 웃는데, 그러다 신문 정치면을 읽으면 누가 옳은지 그른지,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지 조금씩 보인다고 했다. 마침 내가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읽자, 관중과 안영 열전을 보면 올바른 정치인이 누군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알고 싶은 주제를 정한 후 관련 도서 목록을 정하고, 책을 읽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다른 책을 참고하여 읽어가며, 공책에 일련의 과정과 참고 문헌을 꼼꼼히 정리하는 모습은 시종 진지했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석유화학단지에서 평생 근무하다 은퇴한 그분은 독서와 공부를 즐기고 있었다. 졸업장이나 학위, 취직이나 승진을 목적으로 남에게 보이고 경쟁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오직 자신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실천하는 그분을 보며, 노후를 도서관에서 보내는 인생이 꽤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란 말은 실체 없이 계몽과 홍보로 덧칠된 구호임이 분명하나, 우리 인생을 놓고 보면 일리가 있다. 흔히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 한다. 겨울을 앞두고 양식을 차곡차곡 쌓아놓듯 지식과 지혜를 마음에 쟁여 두어야 할 때가 가을이다. 가을 도서관에는 그렇게 겨울을 준비하는 나이 든 학생들이 있다.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 국제신문 디지털뉴스부  2016-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