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수필이 전해주는 따뜻함과 서늘함

 

이승하(시인, 중앙대 교수)

 

 

 

 

  1980년에 일조각에서 발행한 『琴兒文選—皮千得 隨筆集』은 내 애장서의 하나다. 대입 수험생 시절, 국정교과서에 실려 있던 수필 「인연」은 내 피곤한 영혼에 안식의 공간과 회상의 시간을 제공한 아름답고도 슬픈 작품이었다. 이 수필을 읽은 인연으로 대학 1학년 때 이 책을 샀다.

 

  일본인 소녀 아사꼬(朝子)에 대한 피천득의 안타까운 심정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슬픔보다는 서글픔을 제공하였다. 나는 피천득의 수필작품을 읽으면 금세 떠오르는 것이 있다. 대학시절에 읽었던 『백석시전집』(이동순 편)에 나오는 「흰 바람벽이 있어」의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는 것. 시인 백석과 수필가 피천득의 정서를 묶을 수 있는 끈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그래서 어디 좀 멀리 여행을 할 때면 이 두 권의 책을 가방에 넣고 비행기 속에서나 낯선 여숙에서 한두 편씩 읽으며 향수를 달래곤 하였다. 피천득이 수필을 통해 말하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장르 가운데 수필만큼 작자의 영혼을 비춰주는 거울은 없다. 그것이 신변잡기든 인생철학이든지 간에, 자신의 성격ㆍ생각ㆍ사상ㆍ취미ㆍ기호 등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이 수필이다. 피천득의 수필을 읽으면 작자가 참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게 된다. 피천득의 주변인들에 대한 태도는 기본적으로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친일문학에 앞장섰던 이광수를 높이 기리는 글을 쓰면 자신도 비난의 대상이 될 것임을 피천득이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수필 「춘원」을 보면 이광수에 친일 행적에 대해 “그는 아깝게도 한때 과오를 범하였다. 지금 와서 그런 말은 해서 무엇하리.”라는 단 두 마디로 줄이고 그 이상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광수의 인품에 대해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일찍 고아가 되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는데 피천득의 천재성을 알아본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는 피천득을 자기 집에 3년 동안 하숙을 시킨다. 피천득의 평생의 은인이 이광수를 지근가리에서 보면서 인간적인 면모를 파악하게 된다.

 

 

  춘원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다. 그는 남을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남을 모략중상은 물론 하지 못하고, 남을 나쁘게 말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남의 좋은 점을 먼저 보며, 그는 남을 칭찬하는 기쁨을 즐기었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가 비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천성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게 여기게 태어났었다. 그래서 그는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지 못하고 냉정해야 할 때 냉정하지 못했다. 그는 남과 불화하고는 자기가 괴로워서 못 살았다.

 

 

  이런 인품을 가진 사람은 바로 피천득 본인이 아닐까. 색안경을 쓰면 그 색안경 색깔대로 세상이 보이게 마련이다. 그 자신 맑은 눈을 갖고 있으므로 타인도 맑은 영혼을 가진 이로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이다. 그의 수필에는 어떤 사람에 대한 비난이나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이 거의 없다. 웬만하면 좋은 점을 찾아내어 좋게 이야기한다. 글의 기조가 덕담이어서 맥이 없다? 전혀 그렇지 않다. 참된 것을 참되다고 하고 착한 것을 착하다고 하고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피천득은 영문학자답게 셰익스피어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그의 글 속에는 자연의 아름다움, 풍부한 인정미, 영롱한 이미지, 그리고 유머와 아이러니가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작품 평가를 위해 잣대를 사용할 때, 작품성과 함께 인간성을 보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국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는 에세이스트 찰스 램을 피천득은 “남에게서 정중하게 대접받는 것을 싫어하였고 자기를 뽐내는 일이 없었다. 그는 역경에서도 인생을 아름답게 보려 하였다.”는 이유로 흠모하였다. 로버트 프로스트와는 어느 해 크리스마스를 함께하는 인연을 갖게 되는데, “고루하지 않고 편벽되지 않고, 당신의 인간성에는 무리가 없어” 그의 인품을 존경하였고 작품을 사랑하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을 존경한 이유도 사회적 업적 때문이 아니라 “숭고하다기에는 너무나 친근감을 주고 근엄하기에는 너무 인자하였다. 그의 인격은 위엄으로 나를 억압하지 아니하고 정성으로 나를 품안에 안아버렸다.”고 하면서 안창호의 따뜻한 인간성에 매료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는 주변사람들을 줄곧 비판하면서 살아가는 이가 있다. 멀게는 대통령으로부터 가깝게는 학교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비방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광수처럼 남의 좋은 점을 잘 파악하여 그가 없는 자리에서라도 그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 있다. 피천득의 늘 남에 대해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고 따랐으니, 본인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상해사변이 1932년과 1937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다. 상해에서 발생한 중국과 일본 간의 무력충돌사건으로 이때의 체험을 소설 이상으로 박진감 넘치게 쓴 수필이 「유순이」이다. 이광수가 소설 『흙』을 쓰면서 여주인공 이름을 지어달라고 피천득에게 부탁하자 ‘유순’으로 하라고 조언했다는데 그럼 피천득이 겪은 것은 제1차 상해사변이다. 백주대로에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피천득은 조선인 간호사 유순이의 따뜻한 간호를 잊지 못해 총탄 퍼붓는 거리를 질주한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 그것이 피천득 수필의 매력 중 하나인 것이다.

 

  피천득의 수필은 우리에게 인생무상을 가르친다. 아마도 대표적인 작품이 「인연」이 아닐까. 인간인 이상 타인과 이별하거나 사별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이고, 때가 되면 늙고 병들어 죽는 존재임을 그는 많은 수필을 통해 우리에게 말해준다.

 

  피천득 수필의 한 특징인 ‘슬픔의 미학’이 형성된 것은 아마도 가장 큰 요인이 일곱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있지 않았을까. 게다가 어머니마저 열 살 때 돌아가시자 그는 천애의 고아로 살아가게 되는데, 어린 피천득에게 일어난 큰 사건인 ‘조실부모’는 그에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수시로 하게 했을 것이다.

 

 

  그 후 어떤 날 밤에 자다가 깨어보니 엄마는 아니 자고 앉아 무엇을 하고 있었다. 나도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엄마 옆에 앉았다. 엄마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장롱에서 옷을 꺼내더니 돌아가신 아빠 옷 한 벌에 엄마 옷 한 벌씩 짝을 맞춰 채곡채곡 집어넣고 내 옷은 따로 반다지에 넣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슬퍼졌지만 엄마 품에 안겨서 잠이 들었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엄마는 아빠를 따라가고 말았다.

 

 

  아마도, 피천득의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이때 예감한 것이리라. ‘멀지 않아 나도 당신 곁으로 가게 될 겁니다.’ 하는 생각이 죽은 남편과 자신의 옷을 맞춰 장롱에 넣는 행위로 이어졌다고 본다. 이런 어머니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피천득이니 만큼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 죽음에 대한 의식이 남달랐을 것이다. 이 책의 제일 첫 페이지에 있는 글자가 “엄마께”이다. 열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헌정하는 책이 바로 『琴兒文選—皮千得 隨筆集』이다.

 

 「외삼촌 할아버지」에서는 어머니의 외삼촌인 한 노인에 대한 추억담이 전개된다. 손재주가 있던 외삼촌 할아버지는 어린이 피천득에게 연과 팽이, 윷, 글씨 쓰는 분판 같은 만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어머니한테 받은 용돈을 모아두었다가 피천득에게 장난감을 사주기도 한다. 이렇게 내게 헌신적이었던 외삼촌 할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은 그분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오래 사셨더라면 내가 도지사가 못 되었더라도 계약서에 써 드린 금액을 액수로는 몇 배라도 드릴 수 있었을 것을, 그보다도 할아버지를 내 집에 모셨을 것을.

 

 

  이렇게 우리는 정든 사람과의 사별 앞에서는 설움과 고마움, 아쉬움과 그리움 같은 감정이 뒤섞여 착잡해지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죽음을 앞둔 유한자에 지나지 않는데 영원히 살 것처럼 눈앞의 이익 추구에 여념이 없다. 사람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온갖 범죄와 사회악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생로병사, 특히 늙음과 죽음에 대한 순응이라고 할까, 피천득의 수필에는 생에 대한 집착이나 건강에 대한 욕심 같은 것이 안 보인다.

 

 

  백발이 검은 머리만은 못하지만, 물을 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온아한 데가 있어 좋다. 때로는 위풍과 품위가 있기까지도 하다. 젊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천하고 추한 것이다.

 

 

 「송년」이란 수필의 한 대목이다. 늙어서 애욕과 번뇌, 실망에서 해방되는 것도 적지 않은 축복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거지는 한국은행 돌층계에서도 잠을 잘 수 있지만 우리는 허다한 욕심, 즉 “물욕, 권세욕, 애욕, 거기에 따르는 질투, 모략, 이런 것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수가 많다.” 피천득은 불가의 고승처럼 무욕을 실천해야지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피천득이 도연명을 예찬해 마지않았던 것도 바로 욕심을 버리고 살고 싶어한 자신의 인생관을 그대로 실천한 인물이 도연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연명처럼 살기를 원한다.

 

 

  나는 우리 집 온 마당에 꽃을 심었다. 울타리 밑에 국화도 심었다. 그러나 유연히 남산을 보는 심경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그저 오늘도 도연명을 생각한다.

 

 

  도연명처럼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서울시민인 피천득은 “요릿집도, 당구장도, 댄스홀도, 나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한적한 전원에서 남은 생을 살아가기를 원한다. 도연명도 「귀거래사」를 전원에 몸담고 나서 쓴 것이다. 피천득도 도시를 떠나 전원에서 살고 싶어하였지만 그것은 한낱 꿈일 뿐이었다. 도시는 아래의 이유들로 참 싫었지만 벗어날 수 없었으니 얼마나 답답했으랴.

 

 

  찬란하게 차린 여자들도 나에게는 아무 매력이 없다. 영화 구경도 싱거워졌다. 자동차가 연달아 달리는 길을 한 번 걷는다는 것은 큰 고통이요, 버스를 탄다는 것도 여간 끔찍한 노릇이 아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큰 간판들이 눈에 거슬리고, 분에 넘치게 사는 꼴들도 보기가 싫다.

 

 

  이런 이유들로 도시에 살면서도 늘 시골에서 살고 싶어했다. 성정이 조용한 피천득은 시골에 가서 자신의 귀거래사를 쓰고 싶어했지만 그는 도시에서 후학들에게 문학을 강의하였고, 대학을 떠난 이후에는 작품 활동에 전심전력했다. 1974년에 서울대학교를 명예퇴직하였고, 노후에도 시와 수필을 꾸준히 써 『금아문선』(1980), 『금아시선』(1980), 『피천득 시집』(1991), 시집 『생명』(1993), 번역시집 『삶의 노래—내가 사랑한 시: 내가 사랑한 시인』(1994),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1996), 『금아 피천득 문학전집』5권(1997), 『산호와 진주』(2003) 등을 펴냈다. 영문판 시ㆍ수필집 『종달새』(2001), 러시아어판 수필집 『인연』(2006), 일어판 수필집 『피천득 수필집』(2006)을 펴내기도 했으니 명퇴 이후 그의 활동은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진ㆍ선ㆍ미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생로병사에 대한 아픔, 희로애락에 대한 관찰이 누구보다 진지하고 섬세했던 피천득의 작품 활동이 중단된 것은 2007년 5월 25일, 향년 98세 때였다. 이 땅의 문인들 가운데 그 이름을 가장 깨끗하게 보존한 문인이 있었다면 우리는 곧바로 ‘琴兒’을 꼽아야 한다. 아호가 그대로 피천득의 성격과 성품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