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재미다

                                                                                       박 홍 길

제목을 이렇게 달아 놓고 보니 어디서 더러 들은 것 같다. 대학 시절에 들었던 얘긴가? 아무튼 내 생각은 이렇다는 것이다. ‘수필과 재미’, 그러나 지금은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글이 어렵다는 얘기가 된다. 재밌게 써 보려고 마음 다잡기도 했었다. 그러나 마음뿐, 실제로는 주제에 도달하려고 숨가쁘게 몰아치기만 하여, 결국은 앙상한 줄기에 너절한 덩굴만이 엉켜 있을 따름, 감동이란 이름의 잎과 꽃은 거기에 얹혀 있지 못했다.
내 지나간 삶이 서글퍼서, 이를 웃음으로 버무리려고 그동안 너댓 권의 산문집을 엮어 봤다. 거기에는 내 삶의 단면이 그려져 있다.
아기자기한 얘기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써 보려고 했으나 마음뿐, 뼈대 앙상한 글만이 지저분하다. 유머를 가미해 보려 했으나 영 재미가 없다. 거기에는 감동이라는 옷이 입혀지지 않았다. 문장력 없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여러 모임에 발벗고 뛰어가 한몫 끼이듯 재미있게 살아갈 생존전략으로 글을 쓰고는 있으나, 차츰 글쓰기가 고역이 되고 있다. 수필 용수를 모질게 덮어쓰고 있는 셈이다. 장난삼아 끼적거려 보고 있다는 내 맘 자세가 처음부터 틀린 것이다. 가난이 무슨 자랑이라고, 신변잡기나 끼적거린 것이 무슨 글이라고…. 도무지 나의 꽃, 나의 문학이 될 수 없었다.
꽃에 뜻을 불어넣으면 ‘예쁘다’, ‘아름답다’가 된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것이 뜻이다. 사물에 뜻을 갖다 붙이는 작업, 바로 글쓰기다. 문학이란 글을 가지고 감동을 불어넣는 작업일 것이다. 그러니 ‘꽃이 예쁘다’란 새김 정도로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 거기에는 재미가 녹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여태 사물을 보는 눈이 멍청해서 그 사물에 대한 사유의 옷을 입히지 못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의 어설픈 생각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할미꽃 사연’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산언저리로 둘러 가는 편안한 길로 가지 않고, 조금은 가파른 산길로 숨가쁘게 오르내렸다. 그 산길 등성이엔 할머니의 무덤이 있었기로, 오고가며 할머니께 인사하며 얘기하고픈 마음이 사려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무덤 앞에 주저앉아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그려 보면서 오늘 학교에서 있은 일들을 아뢰는 일은 큰 즐거움이 됐다. 무덤에 핀 할미꽃을 조심스레 살펴보며 쓴 글(동시)이 학교장 상을 받게 됐다. 이런 얘기들을 일기장에도 부지런히 썼다. 그리고 중등교 시절엔 <학원>이라는 잡지도 가끔 얻어 읽고 투고도 해 봤다. 지금 생각하니 모두가 눈물 어린 감상뿐인 글이었다. 동심 어린 감상, 그러니 거기엔 사색이 처음부터 들어 있지 않았다. 모두가 사라진 얘기요 추억이다.
대학 시절 문학 강의 시간, ‘사무사思無邪’라는 한 구절을 가지고 한 학기를 거의 때운 교수님이 계셨다. 옳은 말일 것이다. 문학은 양심의 표현이어야 한다. 진실해야 한다. 결론이야 어떻든, 진실만을 강조한 글이 과연 재미있게 읽힐 것인가. 문학이 감성의 표현이라고 하면 거짓꾸밈인가. 문학과 진실, 그리고 감성, 어느 것이 참맛인가.
아무튼 읽히는 글, 거기에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기교가 있어야 한다. 문장력이 있어야 한다. 약간의 과장된 꾸밈도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교시적 기능에 못지않게 쾌락적 기능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매우 어렵다. 두렵다.
요즘의 수필, 참 화려하다. 그 빼어난 문장력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어디서 이 멋진 말들을 배우고 익혔는가 싶다. 달이 ‘밝다’, ‘곱다’로써는 성이 안 찬다. 요즘은 ‘부끄러워한다’ ‘엉큼하다’를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한다. 갈대밭에서 물비늘(윤슬)로 부서져야 제 몫을 하는 것이 된다. 글쓰기의 기교, 참 어렵다.
나는 몇 보따리의 카드를 정리하기 위해 책상 위의 책꽂이와 필통 등을 저 귀퉁이의 작은 보조 책상으로 옮겼다. 그랬더니 내 작업의 폭이 넓어지고 공책이나 필기구, 카드 들을 널어놓는 공간이 시원해졌다. 진작 이래서야 했는데 하고 느낀다. 나를 얽매고 있던 거추장스런 물건들, 바로 내 활동의 폭을 억누르고 있던 이런 벽돌을 허무는 일이 생각의 폭을 넓히는 일이 된다는 교훈이다. 책상, 공책, 카드, 필기구…, 아 컴퓨터 1대면 다 된다는데…. 언제나 한자리에 머물고 있는 내 글 쓰는 자세, 확 뜯어고쳐야 한다고 느낀다.
다시 되돌아간다. 글쓰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이미 펴낸 내 수필집에서 쓴 고백들을 몇 줄 인용한다.

이 무슨 고통이랴. 이따금씩 눈 부라리고 위압하는 강요에 못 이겨, 이리 누르고 저리 치고, 아무리 다듬어 봐도 영영 바로잡히지 않는 몰골의 괴물들을 그냥 부쳐 보내고는, 이제 그만두지, 꼭 그만두지 하던 것이 기수년을 넘기고 있다. … 수필이란 기본 지식조차 없으면서 끼적거려 온 내 글… 패랭이 한 송이 피어나지 않는다. … 비뚤어진 가지, 거칠기가 가시 돋은 선인장 형상이다.

동래 학산의 절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은은하다. 그런데 나는 이 무슨 청승인가. 손에 잡히지 않는 종소리의 여운처럼, 계속 맴맴 돌면서 제 모습을 드러내 주지 않는 사색의 그림자, 완전히 함몰해 버린 감정의 자취일 뿐이다. 날은 새어 가는데….

내 글은 결국 스스로가 한 방울의 이슬도 되지 못한 채 두려운 먼지 찌꺼기로만 남을 것이 분명하다. 비록 송사 될 만한 간섭이야 없겠지만, 아무에게도 미동을 어르지 않는 햇빛, 그러나 그 햇빛 비치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그 이슬 사라지면 머금었던 먼지만이 소롯이 풀잎을 더럽힐까 두렵다.

나는 어릴 때 만년필이나 시계를 줍는 꿈을 자주 꿨다. 그야말로 개꿈이다. 초등학교 졸업 즈음, 한복을 입은 동급생도 더러 끼인 단체 사진을 찍으면서, 흰 종이로 만년필 모양을 만들어, 웃호주머니에 끼고 시계를 그린 팔뚝을 내밀면서 찍기도 했었다.
큰집의 제사 모시러 가던 달밤 풍경, 디딜방앗간의 전설 같은 얘기, 625 때 피란지에서 본 여뀌 잎의 八(팔)자 무늬, 외갓집 가는 길에서 만난 피부병 걸인 아이에 대한 동정, 오십릿길 먼메 나무하러 다니던 고통, 이런 서글픈 얘기들을 웃음 섞어 써 왔다. 한마디로 줄이면 울음에 찌든 우스운 얘기였다.
이제 마무리해야겠다.
내 살아온 과정을 스스로 되돌아 발견하고 정리하면서, 이를 짚고 일어서려는 내 확충의 계기로 삼고자 했었다. 좀더 재미나게 드러내지 못한 것은 성실하지 못해 문학에 대한 소양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문학 언저리를 더럽히는 잡문, 제발 그만 쓰라는 집안 잔소리가 따갑다. 국어학을 한다는 이가 만날 쥐어짜기만 하고…. 사색 없는 잡문, 그래도 내 재미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