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쓰기에서 가식과 진실의 문제)

                                                                               이동민


 

저자 서명까지 들어 있는 수필집이 두 권이나 우송되어 왔다. 김은주, 윤명희, 추선희 3인 수필선집이라는 부제를 단, ‘다만, 오직, 그냥,’이라는 수필집이었다. 3명의 작가 중에 두 명이 보낸 책이었다. 사십 대 중, 후반쯤 보이는 작가들의 이름이 낯설었다. 수필가 협회에서 발간하는 년간집을 뒤져보았지만 그 이름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래 동안 책상 위에 얹혀 있었지만 잊고 있었다. 우연히 책장을 넘기고 읽었더니 글 솜씨가 돋보였다. 세 사람의 글쓰기 양식이 서로 다른 것도 흥미를 끌었다. 솔직히 말해서 원로들, 특히 여성원로 작가들의 글에 실망을 하고 있었던 중이어서 이 글들은 수필쓰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었다. 원로작가가 쓰는 수필은 고답적인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 함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수필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자신을 지나치도록 미화하여 표현함으로 가식의 글쓰기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언어는 어차피 대상을 모두 표현해 낼 수가 없으므로 의미가 모호한 가식으로 위장할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진실을 은폐한 자기 미화가 수필쓰기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다. 수필가 협회의 년간 수필집이나, 3인 선집을 통하여 수필쓰기에서 가식과 진실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였다.

 

 예술은 원초적인 말이라는 메를르 퐁티의 말에서 해답을 구해보기로 하자. 일찍이 예술을 통해서 잃어버린 인간 본래의 삶을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철학자가 있다.(니체) 종교에서 태초라고 말하는 시대의 원초적인 인간의 삶이란 동물적인 삶과 다르지 않다. 태초란 혼돈과 무질서의 상징어이다. 질서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자연과 불일치한 인위적인 삶을 꾸려가도록 하였다.

 

 우연으로 이루어진 동물적인 삶에서 필연 또는 개연성으로 설명이 가능한 규범이나 척도를 만들어 놓고 질서라고 하였다. 잃어버린 삶이란 자연과 일치하여 살던 태초의 삶으로서, 에덴 동산으로 표현한다. 규범에 의한 삶에는 삶 자체에 대한 긍정은 없고, 삶을 규정하는 외부의 힘에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우리는 삶 자채보다는 도덕이나, 관습, 종교 등의 굴레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다. 애댄 동산으로 회귀하는 꿈을 꾸도록 하는 것은 종교도, 도덕도, 과학도, 철학도 아니다. 예술만이 우리를 에덴 동산으로 데려다 준다는 주장을 하였다.

 

 수필은 예술적인 글쓰기이다. 정의에 의하면 인간의 내면을 표출하는 글쓰기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수필쓰기를 통하여 원초적인 인간의 삶으로 회귀할 수 있다. 내면이란 질서를 위해서 억압해버린 원초적인 욕망과 다름 아니다. 에덴 동산에서 삶과 다름 아니다. 억압하는 외부의 힘에만 충실한 글쓰기를 한다면 내면의 표출이란 수필의 정의에 어긋난 글쓰기이다.

 

 예술에서는 억압되어 있는 욕망을 표현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예술 충동을 그의 예술론에 도입하였다. 디오니소스는 회랍신화에서 술의 신이다. 광란과 무질서의 신이기도 하다. 술을 마시면 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의식의 감시가 소홀해진다. 무의식이 사슬에서 풀려나서 동물적인 충동이 일어나면서 자기도취에 몰입함으로 예술이 탄생한다고 하였다.

 

 보수적인 수필가들, 다시 말해서 일부의 원로 수필가들은 쉽게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주장일 것이다. 이들의 성장 배경이나, 교육 배경이 어렵도록 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에 (원로수필가들이 성장할 때의 우리나라도 이 시대와 유사하다.) 중산층과 노동계층이 확대되면서 대중예술이 꽃을 피웠다. 시민들은 대중예술을 휴식을 즐기기 위한 레크레이션 정도로만 취급하였다. 상류층이나 신흥 부르주아지 계층은 대중들과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 고급예술을 주창하였다. 고상한 얘술, 고상한 글, 고상한 지식(교양)을 추구함으로 순수예술을 지향하였다. 순수얘술은 예술 소비자에게 고상하고, 세련됨, 그리고 품위를 요구하였다. 서민들이 즐기던 오페라 극장은 시끌시끌 하였으나, 정숙을 요구하였고, 담배를 피우면서 요란하게 돌아다니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는 금연과 발자국 소리마저 줄이도록 요구하였다. 소설은 명상을 하듯이 조용히 읽어야 했다.

 

 보수적인 수필가들이 주장하는 고상하고 품위 있음에는 이와 같은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편으로 과학의 발달은 종교적인 믿음이 무너지는데 한 몫을 하였다. 종교의 자리에 예술이 대신하여 정신의 고양이라는 역할을 떠맡았다. 최근에는 예술이 철학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이러한 주장들이 예술을 위한 예술로 까지 나아가게 했다. 이것도 보수적인 수필가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9세기가 되자 서양문명의 모순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서양을 지배한 이성주의와 종교적인 카테고리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니체는 규범에 의한 가식의 삶이 아닌 인간적인 삶을 요구하였다. 예술에서도 당연히 고상함과 품위 대신에 인간의 내면을 표출하여 진실을 드러내기를 요구하였다. 의식에 의하여 억압되어 버린 무의식 세계를 조명함으로 진실을 규명하려 하였다.

 

 수필도 앞에서 살펴본 예술사의 흐름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필쓰기가 중산층의 확대라는 사회현상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중산층은 상류층의 문화 양상이었던 정신적인 고상함과 품위를 유지하려 한다. 이들의 기억에는 중산층으로 성장하면서 습득한 고상함, 품위, 교양의 덕목에 향수심리를 가진다. 이들의 글에는 쾌적함을 추구하며, 쾌적함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므로 고상한 인품을 과시한다. 그들의 글에는 평화롭고, 감각적인 즐거움이 넘쳐흐르는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글에서 자신의 인품을 그대로 표현하였다고 믿고 있겠지만 사실은 실재가 아닌 포장된 자신을  표현하였을 따름이다. 욕망을 고상함과 품위, 교양으로 포장하다 보니 진실은 없고, 가식만을 표현하였을 뿐이다. 자신의 진실된 내면은 외면해버린 것이다. 이런 글은 극단적인 감정중심주의의 글이 된다 .진실을 외면함으로 현실도피적인 문학이 되고 만다. 오늘의 우리가 이런 수필을 쓰면서 잘 쓴 글이라는 자기도취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몇 가지 글을 사례로 들어보자. 수필가협회의 년간집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는 글이다. 

 

“솔나무 냄새가 가득한 숲길을 자주 거닌다. 햇빛에 반사된 은빛 물결이 출렁인다. 사색은 나를 윌튼의 숲 길로 안내하고 있다.”

 

“백일홍 꽃이 피었다. 꽃 곁으로 갔다. 현관에서 백일홍까지는 12미터 정도, 햇볕이 모자와 양산을 쓰고 갔다. 백일홍 곁에 머문 시간은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백 일 동안이나 진분홍 예쁜 꽃을 피우다니 의지가 대단하다.”

 

“아이마저 핵교에 가고 나니 고요가 밀물처럼 몰려온다. 김이 나는 커피잔을 앞에 두고 앉으니 깊은 향이 피어 오른다. 슈벨트의 감미로운 음악이 귓전을 간질인다.”

 

“샤갈의 눈 내리는 밤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린다. 어께에 눈을 맞으며 쓸쓸히 돌아오던 그날 밤이 생각났다.”

 

 수필쓰기는 현실도피를 위한 글쓰기가 아니다 .진실과 직면함으로 내면에서 울려오는 아픔을 솔직하게 표현하여야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정원의 꽃을 가꾸고, 화분에 불을 주거나 음악을 듣는 쾌적한 기분만을 표현하는 것은 내면의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므로 수필의 정의에 어긋난다.

 

 ‘고상함’이라는 말에는 ‘지적’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언어를 남발하는 수필도 많다. 지적 언어들은 인간의 감성을 직접적으로 울려주기 보다는 인간의 외부에서 논리성이라는 무기로 인간에게 굴레를 씌우는 이성적인 언어들이 많다. 수필작가들이 개념화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개념어의 권위에 기탁하여 자신의 주장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수가 많다. 지적 언어들이란 니체의 분류에 의하면 이성의 산물이다. 디오니소스적 언어가 아니다. 그만큼 인간적인 삶을 감추는 경향이 있다.

 

 ‘다만, 오직, 그냥’이라는 수필집을 읽으면서 거창한 수필론을 찾아낸 것은 아니다. 세 작가의 글쓰기에서 차이점이 느껴졌으므로 무슨 이유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머리에 얼른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글쓰기의 기본부터 점검해보기로 하였다.

 

 작가는 어떤 대상을 경험하면 몸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받아들이고, 의식에서 관념화한 후에 언어로 재가공하여 표현한다. 그렇다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순전히 자의적일 것이다. 대상의 선택은 작가의 임의에 의한다는 것이다. 대상에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문학은 우리가 직면한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반응을 언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최초로 경험하는 상황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무의식과 의식에 전달되는 것이다. 즉 감각된 상황을 몸이 먼저 알고 반응한 것을 언어로 바꾸어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몸의 느낌을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2009년 가을에 계명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언어에 관한 심포지움을 가졌다. 모리스 불랑쇼의 이론을 응용하여 문학언어는 의미의 확정이 아닌 ‘의미의 의미에 던지는 질문’이라고 하였다. 언어는 대상의 감각적 속성을 제거해버리고 관념화시키므로 소통가능한 기호로 만든 것이다.(헤겔) 이 말은 문학언어는 언어 바깥에 있는 언어(제거해버린 속성)를 담아내려는 노력이라고 하였다. 언어로 담아낼 수 없은 것이 너무 많다. 그렇더라도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은 ‘말하기, 라고 하였다. 언어로 담아낼 수 없더라도 결국은 언어에 기탁하여 담아낼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문학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하였다.

 

 문학언어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경험하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을 감각기관을 통하여 수용해야 한다. 수필쓰기란 대상과 만남이 먼저 일어나고, 몸의 느낌을 경험하고,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보수적인 수필가의 글은 만남의 대상이 일반적으로 인간이 아니었다,라는 것이 년간수필접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감각기관을 통한 몸의 느낌이 가장 강렬할 것이다. 대상에서 인간을 다루지 않는 것은 강렬한 느낌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이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몸으로 느낀 것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수필다운 수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다만, 오직, 그냥’의 작가 중에 먼저 김은주가 선택한 대상을 살펴 보았다.  찌, 똥방, 만어사 진순이(개), 해조음, 도법(刀法), 절정, 거처, 돌꽃, 그림자, 찰나, 흙빛 그 말랑함에 대해, 아담스 애플, 해거리, 밥, 회돌이 법칙이 그가 쓴 수필의 제목이다. 제목에서 보듯이 그가 선택한 대상은 인간이 아니다. 거처나 돌꽃에서 대상이 인간이기는 하여도 관찰의 대상이지 대면의 대상이 아니다. 그만큼 내면의 반응이라는 면에서 부담이 적을 수밖에 없다. 수필이 인간과 인간이 부딪힐 때 생겨나는 갈등이나 감정을 표현한다면 그만큼 솔직하게 표현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대상물이 관찰의 대상이다보니 김은주의 수필은 자연히 작가의 사유세계를 펼칠 수밖에 없다.

 

 찌에서 표현한 그의 사유를 읽어보자.

 

“수면 아래 상황을 눈으로 감지할 수 없으니 찌를 통해 물속을 읽는 것이다. 수면 아래 미끼의 무게와 수면 밖 찌의 부력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질 때 찌는 흔들림이 적고 안정감이 생긴다.”

 

 사색적인 수필에는 논리성이 있어야 독자를 설득할 수 있다. 이런 류의 수필은 다분히 감성보다는 이성에 호소하는 경향이 강하다. 수필이라고 하여 반드시 감성에 호소해야 하는 것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하여 작가가 개념언어를 동원하여 자신의 지식을 강요하는 형식이 아니고, 사례를 통한 설득, 즉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나타내는 방법을 택하였다.  정원에서 꽃을 가꾸거나, 감상함으로 자신의 고고함을 표현하는 글과 비교해볼 가치가 있다.

 

‘똥방’의 경우도 사유세계를 보여주는 글이다.  내가 이 글에서 재미있게 느낀 것은 ‘똥방’이라는 표현이다. 보수적인 글쓰기를 하� 사람은 이런 표현을 기피한다. 품위가 없다는 것이 이유이다. 아마도 ‘변소’라고 표현하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

 

 김은주의 글쓰기는 이처럼 대상의 선택을 인간이 아닌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는 사유를 하는 글이다. 이런 류의 글쓰기를 위해서는 많은 독서를 필요로 한다. 어쨌거나 고상함과 품위에 매몰되어서 감동도 사유도 없는 감정중심주의 글쓰기보다는 훨씬 더 바람직하다. 더욱이 신변의 잡다한 이야기를 사유도 없고, 진실도 없는 글쓰기에 식상한 요즈음에 각광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수필은 어디까지나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의 표현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유하는 글이 단순히 지적 내용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윤명희는 객기, 거룩한 밤, 기다리는 여심, 다시 만난 레드 제플린, 말 대가리 뿔, 잣대, 심연, 용용용용, 생채기, 타(妥), 양철통, 울 엄마, 방앗공이, 얼음이 녹으면, 혼자된 남자를 상재하였다.

 

 윤명희가 쓴 수필의 대상물은 인간이다. 인간과 인간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온갖 감정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접촉하는 사람은 가족이다. 내 경험이 소재가 되어야 하는 수필에서 인간을 대상을 글을 쓰자면 단연 가족이 제일 많아진다. 윤명희도 가족 이야기가 제일 많다.

 

 우리가 키치적 글쓰기라고 할 때는 인간 관계에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만을 표현할 때이다. 나는 한없이 착하고, 내 아들은 공부도 잘 하고, 남편은 가정에 충실하고---, 수필에 표현되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 사람일까,하는 의구심이 드는 글을 많이 본다. 그러나 윤명희의 글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그것도 독자들이 거부감이나, 혐오감을 느끼지 않도록 문학적인 가공하여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 우리 돈 주세요.’

 

기다림에 지친 우리는 사흘이 멀다 하고 빚쟁이 독촉하듯이 졸랐다. 눈만 뜨면 졸라 대는 우리에게 핑계가 궁해진 아버지는 말 대가리에 뿔이 나면 준다고 했다. 소도 아니고 양도 아닌 말 대가리에 뿔이 나는 일이 있을거라고 했다. 그 이후로 그 돈은 말 대가리 뿔 속에 갇혀 나오지 않았다. “

 

 이 글을 읽으면 우리는 아버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작가도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생긴다. 아이들에게 빚(?)을 갚지 못 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눈에 보일 듯이 훤하다. 이 글을 읽으면 작가가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에 이 수필을 썼다. 아버지가 대상이다. 몸으로 느낀 것을 가식 없이 표현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거짓말에 우리는 눈물이 날만큼 인간미를 느낀다. 진실이 느껴진다.

 

 나는 곧 잘 수필쓰기는 작가가 벗기를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혹간에는 내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자신의 온갖 나쁜 일을 그대로 표현하자는 것으로 생각한다.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다. 가족을 팽개치고 바람을 피웠던 이야기는 아무리 솔직하게 쓰더라도 독자에게 감동을 주지 않는다. 혐오감을 준다. 혐오감을 주는 솔직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감동을 주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윤명희의 글은 대상이 인간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솔직한 표현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감동을 준다. 내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믿는 글쓰기 방법론이다.

 

추선희는 또 다른 글쓰기를 하였다. 그는 베이스, 시침질, 나무 아래서, 청라언덕, 보자기, 결, 그냥, 현, 누구나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 튓마루, 90%대 10%, 책가 넥타이, 숨길 수 없는 세 가지, 몸살기, 축제 등을 상재하였다.

 

 추선희는 대상을 따진다면 김은주에 가깝다. 일상의 생활에서 만나는 평범한 것을 대상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는 양식이다. 수필쓰기에서 교과서적인 방법론에 충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교과서적이다, 라는 말은 나무랄 데 없지만,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는 뜻이다.

 

 추선희의 대상은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평범한 것들이다. 의미를 만들어 내는 솜씨는 칭찬해줄 만 하�. 그리고 평소에 자기가 가까이하고 있는 음악에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인생의 방법을 일궈내는 것도 탁월하다. 우리는 흔히 수필의 소재는 자신에게 가장 가깝고, 자신이 가장 아는 것에서 구하라는 말이 있다.

 

 니체와 메를르 퐁티를 다시 한 번 언급해보자. 잃어버린 인간의 삶이라 하였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몸의 반응이라고 하였다. 추선희가 주장하는 삶의 법도는 원초적인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인위적인 질서에 부응하자는 것이다. 예술은 원초적인 언어에 다름 아니다,라고 할 때 어단가 2%의 미흡함을 느끼는 이유일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성문(聲紋)이 있다고 한다. 세상에 같은 목소리는 하나도 없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자신의 귀에 들리는 목소리와 타인에게 들리는 목소리는 조금 다르다. 그래서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듣노라면 낯설다. 우리는 날마다 세상에 하나뿐인 자신만의 목소리로 마음을 드러내면 살고 있다.”

 

 추선희의 수필은 거의가 이런 양식의 글쓰기이다.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인위적인 삶의 질서를 수필에서 강조함으로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내면에서 울려오는 진실의 목소리라고 하기에---, 추선희의 글쓰기 양식이다. 그러나 교양주의의 고상함에 매몰되어 있는 원로들의 글쓰기보다는 훨씬 더 성숙된 글쓰기이다.

 

 김은주가 대상에서 의미를 아주 묵직한 사유를 거친 뒤에 언설하는 것이라면 추선희의 글은 읽기가 아주 편하다. 수필 글은 읽기가 편해야 한다는 것도 나의 생각이다. 
 
<‘다만, 오직, 그냥,’이라는 수필집을 중심으로 한 생각>

영남수필문학회/평론가 이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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