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는 삶의 보물 찾기 / 김우종 (문학 평론가)

  밤에 비가 많이 왔다. 낮에도 그렇게 많이 왔다. 이럴 때 수필가가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목숨을 건지면 목숨 말고도 또 하나 건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수필 한편을 건지는 것이다.. 쓸 거리가 없어서 답답해 하다가 오래간만에 한 편 쓸 거리가 생겼으니까.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재미 있는 얘깃거리를 쓰는 것이 수필이라면 죽는 날까지 아무리 많이 써도 소설가를 못 따라 갈 것이다. 그들은 폭우가 쏟아지고 홍수가 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큰 쓰나미로 인류가 물 속에 꼴깍 잠기는 얘기도 매일 마음대로 쓸 터이니까.

픽션이 아닌 이상 일상생활은 영화처럼 재미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소설이 아닌 수필을 쓰는 이상 재미있는 쓸거리를 기다리는 수필가는 좋은 수필가가 되기 어렵다. 그러니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 떨어지면 받아 먹겠다는 식으로 일 터지기만을 기다리는 수필가는 되지 말아야 할 것같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엠마(보봐리 부인)가 살던 시골마을처럼 신기한 일이 벌어지지 않고 늘 조용한 편이다.

엠마는 그래서 바람이 난다. 간통이 시작된다. 그런데 늘 돈이 필요했다. 이효석의 허생원은 물레방아간을 공짜로 이용했지만 엠마네 동네에는 그런 것이 없었는지 늘 여관방을 이용하다 빚을 지게 되었다. 그녀가 마침내 독약을 먹고 자살해 버린 것은 간통죄를 저질렀기 때문이기보다는 엄청난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이 더 큰 원인이었다. 함께 불장난하던 사내들은 모두 떠나버리고.

엠마는 간통 하면서 스스로 재미 있는 삶을 만들어 내다 끝났지만 수필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렇게 꾸며낼 수 없다. 실제적 사실을 변조하고 거짓으로 꾸미면 수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필의 진가는 오히려 이런 조건 대문에 만들어진다. 평범한 일상적 소재에서 보물찾기처럼 감동적인 주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참된 수필 장르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원정미의 <무명초>도 그런 예가 될 수 있다.

산에서 내려 오다가 화분에 쓰려고 비닐 봉지에 담아 온 흙을 베란다에 그대로 놓아 두었더니 어느날 거기서 잡초 하나가 자라기 시작한다. 도라지나 나리나 붓꽃이라도 피었으면 재미를 끌지만 이런 잡초는 흥미있는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 맨날 봐서 지겨워져 가는  부부들도 그럴 대가 있다. 평범한 남편이나 아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작자는 이 이름 없는 잡초에서 상징적 의미를 찾게 된다.  작자 자신의 모습을 비로소 여기서 발견한다.  작자도 그런 잡초처럼 이름없는 평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힘없고 이름없는 보통사람들 다수의 모습인 것, 그래서 민초(民草)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들로부터 그렇게 인정 받지못하는 존재라 하더라도 스스로의 존재가치는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것, 양보해서는  안되는 것등  작자는 ' 잡초'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며 이를  확인해 나가며 잡초에게도 매일  물을 준다.  

김춘수의 <꽃>에서는 내가 네 이름을 불러 줄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어 주었다고 했지만, 작자는 이 수필에서 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한다. 남이 내 이름을 불러 주어야만 내가 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나를 불러 주고 인정해 주는 것과 상관 없이 나는 나 홀로 존귀하다는 것. 즉 결코 남들의 칭찬 말 몇마디로 내가 귀해지거나 천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자기 발견, 자기 확신, 현대 대중 사회 속에서의 무수한 개인의 소중한 존재가치를 다른 꽃나무들 속에 섞인 잡초를 통해서 발견한 것.

수필은 이렇게 잡초처럼 평범한 일상적 소재 속에서 보석같은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어서 매력이 있는 장르다. 원정미는 처음에 내게 찾아와 문학공부를 하면서 스스로 자기 존재 가치를 수필 쓰기에서 발견해 나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