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로 살아가기

 

 

                                                                                                                         김 형 진

 

 나는 지금까지 2백여 편의 수필을 썼고 지금도 수필을 쓰지만 스스로 수필가라 자부하지 못한다. 스스로를 수필가라 자부하지 못할 뿐 아니라 누가 나를 수필가라 소개할 경우 부끄러움이 앞선다. 나를 돌이켜볼 때 수필가가 갖추어야 할 요건들을 건실히 갖추었다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편의 수필은 수필가의 내면에 적재된 많은 것 중 극히 일부를 표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수필가는 수필을 쓰기 위해 오랜 동안 많은 체험과 사색과 습작을 통하여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이어야 한다. 일가를 이룬다 함은 어떤 분야에서 독자적인 경지나 체계를 이룬 상태가 됨을 뜻한다. 한 편의 수필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수필가의 내면에 잠겨 있는 것이 90%요 수필에 나타난 것은 10%에 도 못 미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진정한 수필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수필가는 생활 속에서 많은 것을 체득하고 깨우쳐야 하며 수필쓰기에 필요한 많은 정보를 취득해야 한다. 넓고 깊은 사유를 통하여 인생관, 세계관, 자연관 등을 바로 세우고,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안목을 가지고 대상을 통찰하여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치열한 작가정신이 밑바닥에서 받쳐 줄 때 진정한 수필이 창작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는 수필문학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문예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불문율이다.

 

 문학작품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들, 소위 문학인이 갖추어야 할 요건은 무엇일까?

 일찍이 구양수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다독(多讀), 다사(多思), 다작(多作), 곧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서 다독과 다사의 결과는 작가의 내면에 채워지는 것으로 작품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다작만이 내면 표출을 위한 수련이므로 표면에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우선 내면의 축적을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 철학, 역사학, 심리학, 논리학 등에 대한 소양을 갖추어 깊이 있고 폭넓은 사유의 틀을 마련하고 이를 통하여 주어진 대상이나 상황을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이를 조리에 맞게 펼쳐낼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철학으로는 관념철학보다 생의 철학이라 일컫는 실존주의 철학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관념철학에서 사물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치중한다면 생의 철학에서는 인간의 삶에 치중한다. 실존주의 철학자이면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까뮈(Albert Camus), 사르트르(Jesn-Paul Sartre)의 철학은 서로 차이가 있지만 인간이 주어진 상황에 주체적으로 대처하여 실존성을 확인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래서 그들의 문학이 현대문학에 공로는 매우 크다. 그리고 실존주의 철학의 기본 원칙에 입각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 인식론 또한 현대문학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역사학자 토인비(Amold Toynbee)는 사람은 누구나 신앙을 갖고 있는데 이에는 저급한 신앙과 고차적 신앙이 있다 했다. 저급한 신앙은 과학에 대한 신앙, 권력에 대한 신앙, 재물에 대한 신앙으로 이는 인간성을 마멸시켜 끝내는 인류의 종말을 초래하는 위험한 것이며, 고차적인 신앙은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적 신앙과 자연에 대한 신앙으로 이것이 인류의 종말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이 토인지의 예언은 저급한 신앙에 휘둘려 사는 현대인에게 따끔한 경종이요,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무거운 책무를 부여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현대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심층심리학深層心理學이다. 심층심리학의 창시자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의 진실은 의식세계가 아닌 무의식의 세계에 있음을 간파하고 꿈이나 부지불식중에 나온 말, 착오 등에 주목했으며, 그 뒤를 이은 융(Carl Jung)은 집단무의식의 세계에까지 범위를 넓혔다. 이 심층심리학은 문학에 일대 변혁을 가져와 무의식의 세계 천착이 현대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소임을 깨우쳐 주었다.

 

 주관적인 생각이나 느낌을 펴내는 데 있어 그것이 주관에 그치고 만다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없다.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조리가 필요하다. 조리는 논리적 서술에 기인한다. 연역법, 귀납법, 변증법 등의 논리적 추론 과정이 진술 내용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설득력을 얻게 된다. 문학작품에 적용되는 논리는 사건의 전개, 심상(image)의 연결, 사유의 발전 등을 서사, 묘사, 서술함에 있어 내면적 질서를 견지토록 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형이하학形而下學에도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문학은 언어(문자)를 표현수단으로 하는 예술이다.’ 이 문학에 대한 정의定義에서 ‘문학’은 종개념種槪念, ‘언어를 표현수단으로 하는’은 종차種差, ‘예술’은 유개념類槪念이다. 이는 문학은 예술의 한 분야인데 언어로 표현한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이 문학이다. 이는 협의狹義의 문학을 정의한 것으로 언어로 표현한 모든 것을 지칭하는 광의廣義의 문학과는 구별된다.

 

 문학이 예술의 한 분야인 이상 예술성이 없는 문학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문학작품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예술에 대한 관심과 탐구가 필수적이다. 예술의 기원, 예술사, 예술의 효능 등에 대한 상식과 아름다움의 실체에 대한 탐색 등을 통해 예술적 안목을 길러야 한다. 아울러 진정한 예술적 아름다움은 표면보다 내면 깊숙이-무의식의 세계- 숨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문학예술에 대한 조예를 갖추어야 한다. 우선 갖추어야 할 것이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재료인 언어에 대한 감각이다. 가루 반죽을 잘하는 사람은 송편도, 새알죽도, 전병도 잘 해낼 수 있다. 언어의 형태, 의미, 기능뿐 아니라 그 언어가 풍기는 어감, 어투까지 체득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을 때 자유자재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됨은 물론이다. 다음으로는 자기 나름의 문학관을 정립하여 이를 문학 활동과 작품창작에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사회의 변천과 문학사, 곧 세계 문예사조사의 골간이 되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의 흐름이나, 우리나라 한문문학의 흐름과 한글문학의 등장과 흐름이 어떤 사회적 변천에 기인한 것인지 숙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학작품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라 한다. 이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우리가 써 세상에 내놓은 한 편의 글은 크든 작든 그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 영향이 밝은 쪽이냐 어두운 쪽이냐에 따라 순기능과 역기능으로 갈린다. 순기능 쪽과 역기능 쪽을 결정하는 요인은 순전히 작가의 문학정신에 달려 있다. 작가가 자연을,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문학예술에 대한 조예와 형상화 능력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장르든 글이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요건을 재미이다. 글의 첫 부분에서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했다면 그 글을 끝까지 읽는 참을성 있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글에 재미를 주는 요소는 무엇일까?

 우선 소재를 들 수 있다. 글을 이루는 재료 곧 이야깃거리가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야깃거리, 알고 있지만 비밀스러운 이야깃거리 등이면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이야깃거리로 호기심이나 관능을 자극하여 저속한 독자에 야합한다면 사회적 역기능을 불러오고 만다. 글에 재미를 부여하는 또 다른 요소는 대상을 보는 개성적인 안목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심안心眼이다. 심안이란 육안肉眼, 또는 과학기기로도 찾아낼 수 없는 것을 찾아낼 수 있는 눈이다. 심안은 순수를 지향하는 사람에게서 쉽게 열린다고 한다. 이 심안으로 대상을 통찰했을 때라야 사물의 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발견하여 자기만의 것, 곧 독창적인 창조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다. 이 독창성이 정서순화와 지적 충족에 기여할 때라야 사회적 순기능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에서 독자와 직접 대면하는 것은 구성, 곧 짜임과 표현, 곧 문장이다. 건축물에 비유하면 구성은 설계도요 표현은 건축물 외형이다. 작품의 주제를 살릴 수 있는 최적의 구성법(설계법)을 찾아 그에 적합한 문장(외형)으로 표현해 냈을 때 자기가 원하는 작품(건축물)을 얻을 수 있다. 특히 특정 작가가 문체에는 그 작가만의 개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

 

 완성된 한 편의 문학작품은, 완성된 건축물이 외형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내부에 들어가서도 안락감을 주는 경우와 같이 독자들에게 외형적인 아름다움과 내면적인 안락을 주었을 때 좋은 작품이라는 평을 받게 된다. 구성주의자들은 한 편의 작품에 들어 있는 요소들은 그것들을 작품에서 떼어 개별적으로 분리해 놓았을 때와 별개의 것으로 본다. 시멘트와 혼합하여 벽의 일부가 된 모래는 길바닥에 쌓여 있는 모래와 별개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작품에 동원된 요소들 하나하나와 그 요소들을 결합한 작품과도 별개의 것이라 한다. 그래서 하나의 작품이 주는 효과은 그 작품에 동원된 요소들의 총합보다 크다고 말한다. 그래서 좋은 작품은 그 작품에 동원된 개별적인 요소, 곧 주제, 소재, 구성, 표현 등이 지닌 효능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이제 수필가가 갖추어야 할 요건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인 이상 수필가가 갖추어야 할 요건은 문학인이 갖추어야할 요건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다만 수필이라는 장르가 지닌 특성을 파악하여 그에 맞는 요건을 갖추면 될 것이다.

 엽섭(?)이라 하는 중국 사람은 ‘수필은 정情, 사事, 이理다.’라 했다 한다. 정은 서정, 사는 서사, 이는 철리哲理이다. 이를 겉으로 서정적 감성과 서사적 사실성寫實性을 갖춘 내면에 깊은 사유에서 얻은 오묘한 이치를 숨기고 있는 게 수필이라 해석해도 될 것이다. 직설하면 시적 감성과 소설적 서사에 철학적 사유를 감추고 있는 것이 수필이란 말이다.

 수필隨筆이라는 명칭의 한자를 글자 그대로 번역한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가 아직도 우리 문단에 횡행하고 있는 현실은 가슴 아픈 일이다. 최승법은 ≪한국 수필문학 연구≫에서 남송 때 홍매洪邁의≪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 조선 후기 연암燕巖의 ≪일신수필馹迅隨筆≫에 이르기까지 쓰인 수필은 한․중․일 두루 서명書名 또는 책명冊名으로 쓰였음을 설파한 바 있다. 원래 필筆은 설說, 담談, 표表와 함께 중국 산문의 한 종류 이름이다. 그것이 지금은 문학의 한 부문명이 되어 한·중·일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풀이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아직도 수필을 ‘무형식이 그 형식’인 글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야말로 어불성설, 삼라만상 중에 형식 없이 존재하는 것이 있겠는가. 배정인은 ≪참수필 짓는 이야기≫에서 지금까지 수필의 성격을 규정하는 근거로 거론되어 온 ≪용재수필≫의 서문 중 ‘意之所之 隨卽記錄 因其先後 無復詮次’는 ‘글을 쓰게 된 경위와 태도와 글을 싣는 순서(편집)’임을 밝힌 바 있다. ‘생각한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짤막짤막하게 써서 이를 차례를 정하지 않고 편집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필은 생활 속에서 얻은 이야깃거리를 짤막짤막하게 쓴 글이라는 결론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볼 때 ‘수필은 생활 속에서 얻은 이야깃거리를 짤막짤막하게 산문으로 쓴 문학이다.’ 라 정의할 수 있다. 여기 ‘생활 속에서 얻은 이야깃거리’를 놓고 신변잡기身邊雜記라 폄하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질서 없이 쓴 글이라는 말이다. 어떤 장르의 문학이든 그 소재는 생활에서 얻게 마련이다. 그런데 왜 유독 수필에만 신변잡기라는 용어가 붙어 다니는 것일까? 시는 원시신앙의 주술呪術에서 비롯되었고 소설은 동네 고샅에서 떠도는 이야기[街談巷語]에서 시작되었다. 그리 볼 때 수필이 신변잡기에서 시작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도 시를 주문이라 하거나 소설을 가담항어라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 수필가 중에는 신변잡기를 탈피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체험기나 가족이야기, 자기자랑은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는 이가 있으니  이는 수필을 모독하는 행위라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성찰을 통해 수필이 신변잡기라는 오명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 어엿한 문학의 한 장르로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것이 수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막중한 책무임을 통감해야 한다.

 

 상상은 문학의 근간이다. 아직도 수필문단에서는 허구[fiction]을 금기시 한다. 그래서 수필을 논픽션(실화)라 하는 이까지 있다. 허구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라면 이는 마땅히 수필에서 추방해야 한다. 그러나 문학성을 살리기 위해 사실에 근거한 상상이라면 이것까지 배제하고서야 어떻게 문학이 되겠는가. 김소운은 ‘진실이란 반드시 사실 그대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 했다. 문학이 진실을 천착하는 작업이라면 대상의 표면만을 사진 찍 듯해서는 문학성을 획득할 수 없다. 겪은 일을 사실事實대로 설명한 글은 도저히 문학작품이 될 수 없다.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인 이상 시나 소설을 쓸 때처럼 주제를 정하고 소재를 선정하여 이를 조리에 맞게 배열한 다음 부드럽고 알기 쉬운 문장으로 표현하는 절차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어야 한다. 이때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은 주제에서 이탈한 구성이나 표현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표현이 문학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형상화가 필요하다. 형상화란 형상이 없는 내면의 세계를 오관에 의해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작업이다. 작가가 대상에서 얻은 개성적인 느낌이나 생각을 시각, 청각, 후각, 취각, 촉각에 호소하여 펼쳐냄으로써 독자가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통해 작가의 느낌이나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형상화이다. 이는 추상적인 내면의 세계를 표출하는 표현 방법이다. 이 형상화는 작가의 상상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기가 겪은 일, 대상에서 받은 생각이나 느낌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체험담, 감상문, 서간문, 일기, 전기, 보고서, 기사문 등은 문학예술과는 거리가 멀다. 윤오영은 ‘시적 이미지와 소설적 표현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항상 추구하는 수필과정이 된다.’라 했다. 문학성 획득을 도외시하고 ‘붓 가는 대로 쓰는 글’, ‘신변잡기’, 논픽션으로만 알고 수필을 쓰는 사람들이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이다.

 수필가들이 유의해야 할 또 한 가지는 독자의 몫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성주의 이론에 의하면 한 편의 글은 독자에 의해서 완성된다. 작가가 독자의 몫까지 빼앗아 할 말을 다해버린다면 그 글은 영원히 미완성의 글이 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한국수필의 역사적 흐름에 대한 고민해 보아야 할 일이다. 고려시대의 파한집破閑集,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등에서 조선시대의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열하일기熱河日記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문수필에 대한 것이다. 18c 말엽에 등장한 동명일기東溟日記를 비롯한 우수한 국문수필의 출현과 쇠락에 대한 고찰과 그리고 그 계승과 발전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신문학기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단절된 한글수필을 현대수필에 이어준 것은 그나마 김상용, 윤오영, 목성균의 수필이 아닌가 한다.

 

 ‘글은 곧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수필가와 직결되는 말이다. 수필에는 대리인을 등장시킬 수 없다. 의도적으로 ‘나’를 생략하고 쓴다 해도 수필 속에서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주체는 곧 ‘나’이다. 그렇게 볼 때 한 편의 수필은 작가가 자기의 알몸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기의 치부를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 또 자기의 자랑거리를 과장하여 드러내는 것, 시대의 흐름을 좇아 권력에 아부하는 일, 통속적인 독자에 영합하는 일은 작가의 윤리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수필가는 알몸을 드러내 보임에 있어 떳떳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닦아야 한다.

 

 윤모촌은 <수필인의 격>에서 ‘사람은 저마다 자존심으로 산다. 그런데 수필인에게 이것이 지나치면 오만무치傲慢無恥와 자존망대自尊妄大로 빠져 그것이 자신의 불명예인지를 모른다. 이런 격의 수필인은 반드시 독선적이고 그 주변에는 아첨꾼이 꼬여든다. 그리고 아부하지 않는 자는 무참하게 배척한다. 이 아첨과 오만무치는 필연적으로 야합해서 그것이 자승自乘되면서 이성을 잃는다. 그리하여 글 장난질을 하고, 속문俗文도 명문名文이라 내세워 야합을 한다.’라 했다. 수필가의 오만무치와 아침이 더 없는 천격賤格임을 깨우쳐준 글이다.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일은 원래 외롭고 고달픈 작업이다. 또 주체적인 안목으로 현실을 통찰하고 거기서 얻은 문학적 요소들에 투철한 문학정신을 반영하여 자기의 세계를 구현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래서 작품 한 편을 탈고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작품에 자기의 세계가 얼마나 문학적으로 승화되었는가를 되짚어보는 일이다. 아울러 자기의 세계관, 자연관, 인생관이 얼마나 잘 녹아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선비 중에 상上은 이름을 잊고, 중中은 이름을 세우고, 하下는 이름을 훔친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여기서 ‘선비’를 ‘문인’으로 바꾸면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순기능을 좇는 문인은 상에 속한다면 역기능을 좇는 문인은 하에 속할 것이다.

 

 수필가로 살아가는 길은 험난하다. 여느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독창적인 심미안審美眼을 갖춘 예술가가 되어야 하며, 마음의 눈을 열어 상황의 진실을 천착해 예술적으로 표출하는 문학가가 되어야 하며, 생활 주변에서 포착된 대상에 철학적 사유를 융합시켜 짤막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수필을 쓴다는 것. 이것은 수십 년을 탁마琢磨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험난한 길이다. 나는 아직도 내 성면 앞에 ‘수필가’라는 칭호를 붙이지 못한다. 진정한 수필가의 길이 아직도 묘연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