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과 인문학적 통찰력의 강화

━ 수필의 자폐성 극복을 위해

 

    신재기

1.

“수필가 여러분은 다른 수필가의 작품을 즐겨 읽습니까? 수시로 배송되어 오는 수필 잡지, 동인지, 수필집 등을 전부 읽습니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답은 뻔하다. 한결같이 그 답은 “아니요.”일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보내오는 수필집이 처치 곤란하니 보내지 말라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책을 보내는 사람이나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고마운 마음으로 책을 받는 태도와 불평을 늘어놓는 태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책을 읽지 않는다는 점에서 둘은 크게 다를 바 없다. 객관적 자료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나 일반 독자보다 수필을 쓰는 수필가가 수필을 더 읽지 않는 것 같다. 수필을 쓰네 하고 폼 잡는 수필가 중에 많은 사람이 다른 수필가의 작품에 관심이 많지 않다. 남의 글을 읽지 않고 어떻게 작품을 창작하느냐고 한마디 하고 싶을 정도다. 어떤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작품을 많이 읽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고 충고하지만, 이런 말은 별로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수필가조차 수필을 읽지 않으니 일반 독자야 오죽하겠는가? 지금 수필가 대부분은 독자  없는 수필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2.

여기서 창작 주체인 수필가가 오히려 수필을 읽지 않는다는 점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수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많이 읽어야 한다고 설득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뜬구름 잡는 일인지는 모르나 왜 수필이 읽히지 않을까, 라는 점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이유는 도처에 있다. 가장 넓게는 문학의 위축을 꼽아 본다. 수필뿐만 아니라 모든 문학작품에서 독자가 떠나고 있다. 독자가 종이에 활자로 인쇄된 책이나 문학 작품을 숭배했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디지털 시대에서 문학은 숭배의 대상에서 밀려났을 뿐 아니라 홀대까지 받는 처지가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와 대중적 문학 장르로 급부상한 수필이라 하더라도 이 같은 시대적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다. 활자 매체의 읽는 시대에서 디지털 매체의 보는 시대로 바뀐 오늘의 현실에서 문학의 독자 축소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수필의 독자가 없다는 점을 크게 부각할 문제는 아닌 듯싶기도 하다. 책, 독서, 문학 등의 활자 매체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설명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는 수밖에 없다. 작가와 독자 사이의 상호소통과 교감이라는 문학의 체계가 무너지고, 작가 개인의 표현 욕구 충족이라는 새로운 체계가 형성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3.

수필 문학에 독자가 없는 현실의 모든 원인은 수필 밖에 있고 수필 자체 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그저 시대 문화의 흐름 탓이라고 한다면 더 할 말이 없다. 대세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하지만 이런 태도가 문제다. 이는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는 패배주의자가 자기 위안을 얻으려는 안일한 대응 방식이다. 문제가 있다면 무엇일까? 우선 과다한 개인주의 성향에서 그 원인을 찾아본다. 20세기 서구문학의 수용과 함께 새로운 글쓰기 방식으로 출발한 한국 현대수필은 개인이 자신을 드러내고 고백하는 방식이란 점에서 추동력을 얻는다. 공동체 윤리에 억압되었던 개성이 분출구를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현실과 분리된 낭만주의적 범주로 문학을 학습한 우리 근대문학은 자연스럽게 작가 개인의 서정을 문학의 진수로 착각한다. 1930년대 들어와 한국 현대수필이 급격하게 팽창했던 연유도 이 같은 문학사적 맥락에 닿아 있다. 현대수필이 출발할 당시에는 수필 쓰기 방식을 비판하는 비평이나 메타담론이 등장하여 수필 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나름대로 제시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1930년대 전반기에 한 번, 후반기 한 번 반짝하고 끝난다. 1980년대 이전의 한국 수필사에서는 창작 방법에 대한 이론적 성찰이 거의 없었다. 이론적 바탕이 취약한 가운데 세계와 자연을 자아의 서정으로 동화시키는 글쓰기, 작가 개인의 심경을 고백하는 글쓰기, 사소한 일상의 파편을 서정이라는 그릇에 담아내는 글쓰기로서 수필은 점점 고착되어 갔다.

 

4.

한국 현대수필이 채택한 개인을 드러내는 글쓰기 혹은 작가 내면 발설로서 글쓰기 방식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이어져 왔다. 1990년대에 오면 우리 사회와 문화는 급격히 개인주의적 성향을 드러낸다. 이는 부분적으로 1970∼1980년대를 온통 뒤덮었던 사회학적 상상력에 대한 염증과 반작용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압축적으로 진행되었던 한국의 근대화는 1990년대에 이르면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을 타고 가파른 ‘전환기’를 맞이한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 정보화 사회, 대중 사회, 소비 사회 등으로 규정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국면에 접어들면서 ‘개인화’는 가속화된다. 특히, PC와 인터넷 보급으로 광장에 집결했던 군중은 컴퓨터가 설치된 개인 밀실로 귀환한다. 현실 세계는 인터넷으로 구축된 가상 세계로 치환되고, 가상 세계는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등장한다. 2000년대에 이르면 인터넷은 모든 사람의 일상까지 지배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모바일 이동통신의 생활화는 우리 삶을 디지털 문화의 한복판으로 몰아넣었다. 디지털 문화로의 급속한 전환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 한가운데 개인화가 놓여 있다. 이러한 개인주의와 대중성을 지향하는 디지털 문화는 수필의 기본 속성인 개인 고백의 방식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는다. 근대화의 출발과 함께 개인의 발견이 수필이란 글쓰기 장르를 탄생시켰다면, 21세기에 도래한 디지털 문화의 극단적 개인화는 수필 문학의 개인주의를 확장하는 최적의 환경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한국 현대수필 100년사는 개인주의 성향의 고착화로 이어 온 셈이다.

 

5.

문학이 정치적이고 도덕적 책무를 감당해야 한다는 주장의 반대편에는 현실적 효용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문학이라는 생각도 공존한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 변혁이나 정치적 목적성에 봉사하는 문학은 작가 개인의 창조적 내면성과 심미적 가치를 억압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비판한다. 문학이 어떤 통로로든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을 때가 있었던 반면에, 순수한 미적 쾌락을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도 만만찮았다. 특히, 한국 현대문학은 이 양자의 대립된 구도 내에서 그때마다 기울기를 조절하면서 적절한 논리를 세워왔다. 두 극점은 합치할 수 없는 평행선이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쪽을 버려야 하는 모순된 양면성을 지니는 것이 문학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오늘의 우리 수필이 극도의 개인화에 편향되었다는 점도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선택이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몇 걸음 물러나 우리 수필을 바라보자. 수필가 개인의 내면성을 일구어 가꾸는 일에서 출발한 것이 수필이 아니던가? 수필 쓰기가 개인을 발견하는 데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수필의 개인성이 깊어지는 것은 수필 문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디지털 문화가 몰고 온 시대적 흐름일 뿐이다. 이 거대한 물줄기를 거스를 수 없기에 수필 창작 방법에 대한 비판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실효성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시대적 흐름으로 모든 책임을 돌리고 한국 현대수필의 개인화 경향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포기한다면, 우리 수필의 자폐성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6.

우리 수필의 자폐성은 극한에 이르렀다.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 작가의 시선이 안으로만 쏠리지 않고 타자와 외부 세계로도 돌려져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약화된 ‘지성’의 복원이 필요하다. 여기서 지성은 주관적 감성과 대립하는 이성적 사고나 분석적 판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수필가의 사회적 책무를 뜻한다. 굳이 거론한다면, 이는 사르트르의 참여문학과 맥락을 같이한다. 시효가 끝난 듯한 개념을 새삼 들먹거리는 것은 급처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필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혹은 이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반성적 사유가 전무한 우리 수필계에는 도수 높은 지식인의 역할이 요구된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의 변명》에서 지식인을 “자기 일이 아닌 남의 일에 뛰어드는 자, 자신을 가꿀 줄 알고, 시대의 잘못을 읽을 줄도 알고 이에 대한 불평, 불만을 하기보다 당당히 비판하며, 상처받은 어린 영혼을 위해 실천하고 희생한다. 사회의 보편적 가치들이 다치거나 희생될 때 그냥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험난한 가시밭길을 스스로 택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참여문학이란 개념을 모범으로 삼아 수필가가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는 수필가, 그런 정신을 반영한 수필을 만날 수 없을까? 자기 중심주의의 주관적 서정과 윤리적 가면이 난무하는 우리 수필계에는 새로운 방향전환이 절실하다. 세상의 모순을 비판하고 연민으로 타자를 포용하는 태도는 현대수필이 실천해야 할 모랄이다. 그 첫 번째 길이 지성을 강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7.

사회참여로서 문학, 사회적 책무를 인식하는 지성인, 변혁을 위한 비판정신, 타자를 내 안에 두려고 하는 연민 등은 넓게 보면 인문학적 통찰력에 해당한다. 사회학적 상상력이 실천적 행동의 길을 열어준다면, 인문학적 통찰력은 수필 쓰기의 정신적 지향점이다. 인문학적 사유는 주체의 내적 발견과 세계의 외적 인식의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자기의 내적 성찰이나 세계와 대상에 대한 진리 인식 어느 한쪽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문학적 사유가 종국적으로 자기 자신을 재조정하는 반성적 사유라고 한다면, 그것은 고립된 주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는 타자가 되면서 자기가 되고 자기가 되면서 타자가 된다. 자기는 자신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고유한 실체성을 잃어버린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속한 것들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유래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반면 자신을 엮어내고 있는 타자들을 알면 알수록 자신의 고유한 내면성을 회복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새로운 형식 속에 단순화하는 내적 부정성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성이다. 반성은 타자화 속의 자기화이자 자기화 속의 타자화다.”(김상환의 《철학과 인문학적 상상력》). 지금 우리 수필이 마련하는 반성적 공간은 역사적 조건이나 외향적 발견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그 자체 안으로 자꾸만 축소되고 있다. 외적 세계와의 관계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자기성찰이 가식의 포즈로 끝나고 실질적인 자기 조정이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다. 수필이 진정한 자기성찰의 문학이 되려면 외부 세계의 조건과 연결된 주체의 대자적 내면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8.

사회적 책무의 인식이나 인문학적 통찰력 발휘는 우리 수필 문학이 자폐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광의의 이념적 지향이라 할 수 있다. 즉,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는 데 요구되는 기본 방향의 설정이다. 다음 단계로는 전환의 효력을 얻을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의 강구다. 가장 손쉬운 길은 인접 장르의 방법을 응용하는 것이다. 이는 수필의 새삼스러운 영역 확대가 아니다. 수필은 이미 여러 인접 장르와 영역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수필의 장르적 범주는 광범위하다. 다양한 글쓰기 방식을 유연하게 받아들여, 그것을 상황에 맞게 융합하고 선택하는 것이 수필 쓰기다. 이것이 수필의 고유성이다. 경계를 지워버리고 변방으로 확장하는 에너지를 가진 글쓰기가 수필의 본성이라는 뜻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한국 수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방안의 하나가 ‘칼럼’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응용하는 일이다. 현재 주로 일간지 신문에 게재되는 시사 칼럼은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의 이슈에 관해 필자의 주장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글쓰기로서 전형적인 에세이에 해당한다. 주제의 외향성과 시사성, 글 전개의 논리성, 작가의 분석적 시각 등이 칼럼의 특성이다. 이런 특성은 현재 우리 수필의 주류를 이루는 주관적 서정성, 개인적 내면성과 자폐성, 사회 현실 문제에 대한 무관심, 삶에 관한 보편적 해석의 부재 등을 매우 효율적으로 완화해 주리라고 생각한다. 수필과 칼럼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양자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서로의 특성을 수용하는 융합형의 글쓰기가 확산되고 있다. 이런 방법의 글쓰기는 양자의 편향성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9.

흔히들 수필은 시와 소설의 중간적 성격을 지닌 장르라고 말한다. 수필이 시의 압축성과 비유적 수사를 선망하지만,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토대는 ‘산문’이다. 수필은 산문으로서의 본래 위치를 지킬 때 자기 정체성을 가장 뚜렷하게 확립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짧은 수필을 주장한다. 수필은 형식적 자기 변신의 폭이 좁은 관계로 오랫동안 엇비슷한 모습과 방법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안팎으로 새로운 변화를 갈구했다. 이런 요구가 커지자 문학적 압축성이란 상투적 논리에 근거하여 짧은 수필을 추구하는 하위 장르 개념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우리 수필 문학에 변화를 주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 수필의 뿌리가 산문이라는 점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다. 수필의 자기 변신은 같은 산문인 소설로 향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소설로부터 이념과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중 수필 문학의 잠재적 특성을 살려 활력을 얻을 수 있는 요소가 바로 ‘서사’ 혹은 ‘이야기’다. 수필의 기본 문체는 설명적 진술이다. 그런데 이는 작가가 독자에게 직접 말하는 방식이기에 독자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오히려 화자가 한 발 물러서면 독자는 다가온다. 그 방법이 서사적 구성이나 이야기하기다. 서사적 구성 자체가 벌써 메시지를 담아내는 해석의 방법이다. 잘 구성된 서사는 재미와 뚜렷한 주제의식으로 독자를 흡인할 수 있다. 수필이 소설처럼 하나의 완결된 서사를 구성하기 어려우나 부분적으로 서사와 이야기를 취해도 자폐성을 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10.

수필이 독자한테 외면당하는 까닭은 외부와의 소통을 외면하고 자기 스스로를 밀폐된 공간으로 가두는 폐쇄적 경향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수필의 고유 영역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된 것이지만, 고유성을 확립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립을 자초한 결과를 낳았다. 오늘 우리 수필 문학에 부과된 급선무는 골이 깊어진 자폐적 글쓰기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에 가장 필요한 것이 지성과 인문학적 통찰력를 강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방법 측면에서는 칼럼이나 소설 등의 인접 장르가 가진 요소 중에서 필요한 것을 찾아내 응용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요소는 이미 수필에 잠재한다. 그래서 응용이라기보다는 복원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