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읽는 재미 / 하병주

 

 

 

 

  수필은 대개 필자 자신의 체험을 위주로 해서 쓴 글이다. 그래서 수필을 흔히 신변잡기라는 말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수필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더러는 필자의 체험이 바로 나의 체험과 일치하기도 한다. 즐거웠던 일이든, 슬프고 힘들었던 일이든 내가 겪었던 그 일을 그 사람도 겪었구나,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고 나와 같이 결론을 냈구나 하는 걸 발견했을 때는 더욱 공감이 가고 친근감이 느껴진다. 그 작가를 한 번 만나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원래부터 알고 지내는 사람의 수필을 읽을 때는 “아, 이 사람에게 이런 면도 있었던가?” 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때도 있다.

 

  수필은 고백의 문학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떤 사람의 수필 몇 편만 읽어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또는 가치관이나 정서를 대충 파악할 수 있다. 분량이 많아도 소설은 치밀하게 계획된 허구일 뿐이다. 그러나 수필은 짧은 글 속에 쓴 사람의 진실이 담겨 있어 더 정겹고 재미있고 감동이 오래도록 남는다.

 

 

 수필은 읽기에 만만해서 좋다.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한 권 또는 몇 권으로 되어 있는 소설을 읽는 데는 부담을 느낀다. 논설문이나 전문서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수필은 가벼운 마음으로, 잠깐 뒤뜰을 거닐 듯,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동안 한 편의 수필을 다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글이 짧다고 해서 그 안에 들어있는 의미가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다. 수필가는 대개 나이 지긋한 분들이다. 따라서 살아온 연륜 만큼이나 글도 깊이가 있고 구수하고 정겹다. 절제된 언어와 간결한 문장으로 형상화 된 좋은 수필은 읽는 사람을 감동시켜 마음을 즐겁게도 하고 숙연하게도 한다.

 

 

 독서가 다 그렇다시피 수필을 읽으면서 몰랐던 고운 우리말들을 알아가는 것도 수필 읽는 재미에서 빼놓을 수 없다.

 "…이팝나무 우듬지에는 불그무레한 기운이 우련하다.…귀밑으로 흘러내린 몇 올 살쩍, 검은 상복에 떼꾼한 눈…장례식장 안은 뜻밖에 가분하고…잉잉대며 밀려오는 저 문문한 울림…"-정태헌의 수필 <여여(如如)하니>에서-

 

 

  위에 예시한 문장의 토막들은 정태헌 작가가 문상 가서 느낀 사실을 써서 어느 잡지에 게재한 수필의 일부분이다. 원고지 7장 쯤 되는, 짧으면서도 좋은 글이다. 그러나 별도로 주석을 붙인 단어 5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어서 사전을 찾아보고야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수필을 읽을 때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밑줄을 긋고 사전을 찾아서 비망록에 적어둔다. 글을 읽다가, 그것도 짧은 수필을 읽다가 사전을 뒤적인다는 건 귀찮은 일이다. 뿐만 아니라 사전을 찾아봐야 그 뜻을 알 수 있는 말들이 많은 글이 반드시 좋은 수필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그냥 알 수 있는 말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글을 쓰는 작가라면 마땅히 잊혀져가는 아름다운 우리말의 보존 ․ 전파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위에서 예로 든 글은 아주 짧지만 내가 모르던 말 5개를 배울 수 있어 수필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현재를 수필 전성시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필잡지가 많다. 확실한 통계는 모르지만 월간, 격월간, 계간 등 거의 30종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내 책장은 지금 포화상태다. 정기 구독하는 건 서너 가지에 불과하지만 수시로 보내오는 개인 수필집까지 가세하여 책이 날로 쌓여간다. 전국에 산재한 수필가는 또 얼마나 많은가. 수필잡지를 통하여 등단한 수필가의 수가 1년에 백 명도 넘을 것이다. 하지만 수필잡지가 많고 수필가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 넘쳐난다고 해서 반드시 수필문학 발전에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 글에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내 방 앉은뱅이책상 곁에는 언제나 수필잡지와 개인 수필집 몇 권이 놓여 있다. 그래서 아무 때나 펼쳐서 읽는다. 말하자면 수필 속에 묻혀 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날마다 수필 읽는 재미에 젖어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