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성격 / 尹五榮 



 "에세이는 그 자체가 원래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로 되어진 문학"이라고 한 알베레스(R. M. Alberes)의 말은 수필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이미 수필의 내력에서 그 형성 과정을 살펴본 바와 같이 수필은 원래가 학문인·지식인의 글이다. 그러므로 수필이 지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정서적(情緖的)이어야 한다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좋은 수필에 나타난 서경(敍景)의 아름다움은 꽃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한 겹 놀 속에 비치는 꽃과 같은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태양 아래의 세계라기보다 달밤의 세계다. 코를 찌르는 향기가 아니요,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종소리 같은 향기다. 그것은 경물(景物)이 정서로 곱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주자청(朱自淸)의 〈달밤의 연못[荷塘月色]〉에서도 이것을 느꼈다. 그들의 회상과 서사는 가끔 환상적인 세계에서 신비의 안개를 피우기도 한다. 램의 〈꿈속의 어린이>에서도 이것을 느꼈다. 우리는 그들의 슬픔에서 오히려 행복 같은 기쁨을 맛봐야 했고, 웃음 속에서도 슬픈 애수(哀愁)를 느껴야 한다. 이것은 그윽한 표현이 실어다 주는 기환(奇幻)이다. 그리고 램의 〈고도기(古陶器)〉에서도 이것을 느꼈다. "수필은 정신의 운동이다.", "움직이는 마음의 그림자다." 하는 말도 이해될 것이요, "붓 가는 대로 써진 글", "누에가 실을 뽑듯 써진 글"이란 말도 그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솜씨를 찬탄한 말인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수필의 내용은 서경(敍景)·회고·서정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심정이 부딪히는 곳마다 수필의 꽃은 핀다.

 서사(敍事)·논리(論理)는 가장 비중이 큰 것으로 수필은 "불만과 격정과 관용의 유로(流露)"라고 한다. 그런데 이 유로(流露)란 점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사물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면 운다(物不得其平則鳴)'라고 했다. 단애(斷崖)가 없으면 폭포는 없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극히 고요하고 평온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바닥에 무수한 자갈과 경사가 없으면 물소리는 없다. 시냇물이 맑고, 그 리듬이 아름다운 것은 아는 이가 많지만 폭포의 내리찧는 물이 더욱 맑고, 그 리듬이 더욱 고른 것은 생각하는 이가 적다.

 그들의 서사(敍事)는 단순한 서사가 아니다. 먼 데서 몰려오는 조수(潮水)와 같은 감정이 말없이 전편을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백영숙(白永叔)을 보내는 글〉에서도 이것을 느꼈다. 긴 인생을 체험하며 겹겹이 싸인 회포가 간단한 두어 마디 엷은 웃음으로 처리된다는 것은 비상한 수법이 아닐 수 없다. 장대(張岱)의 〈호심정기(湖心亭記)〉에서도 이것을 느꼈다. 범연한 독자는 흔히 이것을 살피지 못하고, 남의 글을 가볍게 지나쳐, 그 함축과 진미를 모른다. 익살과 웃음으로 능사를 삼고, 잡박한 지식과 천박한 재치로 없는 내용을 다 기울여 노출시키는 속문(俗文)이 많이 읽히는 소이다.

 다른 문학은 마음속에 얻은 것을 밖으로 펴지만, 수필은 밖에서 얻은 것을 안으로 삼킨다. 그러므로 수필의 대상은 자기다. 결국 수필은 외로운 독백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독자를 더욱 잡아 흔드는 것이다. 필자는 노신(魯迅)의 글에서도 가끔 이런 것을 느꼈다. 그러므로 좋은 수필은 독자의 앞에서 자기를 말없이 부각시킨다. 우리는, 시나 소설에서는 그대로 그 시나 그 소설에 경도되고 만다. 그러나 수필에서는 항상 작가의 모습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또한 수필의 중요한 특색이다.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桃]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곶감[乾枾]에 비유될 것이다. 밤나무에는 못 먹는 쭉정이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밤나무라 하지 쭉정나무라 하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면 쭉정이도 밤이다. 복숭아에는 못 먹는 뙈기 복숭아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역시 복숭아나무라 하고 뙈기나무라고는 하지 않는다. 즉 뙈기복숭아도 또한 복숭아다. 그러나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똑같아 보이지만 감나무에는 감이 열리고 고욤나무에는 고욤이 열린다. 고욤과 감은 별개다. 소설이나 시는 잘못 되어도 그 형태로 보아 소설이요 시지 다른 문학의 형태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수필이 잘 되면 문학이요, 잘 못되면 잡문이란 말은 그 성격을 구별 못한 데서 온 말이다. 아무리 글이 유창하고, 재미있고, 미려해도 문학적 정서에서 출발하지 아니한 것은 잡문이다. 이 말이 거슬리게 들린다면, 문장 혹은 일반수필이라고 해도 좋다. 어떻든 문학 작품은 아니다. 

 시는 시어(詩語)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로 조성되어 있다. 그러면 곶감은 어떠한가. 감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 푸른 열매가. 그러나 그 푸른 열매는 풋감이 아니다. 늦은 가을 풍상을 겪어 모든 나무에 낙엽이 질 때, 푸른 하늘 찬 서리 바람에 비로소 붉게 익은 감을 본다. 감은 아름답다. 이것이 문장이다. 문장은 원래 문채(文采)란 뜻이니 청적색(靑赤色)이 문(文)이요, 적백색(赤白色)이 장(章)이다. 그 글의 찬란하고 화려함을 말함이다.

 그러나 감이 곧 곶감은 아니다. 그 고운 껍질을 벗겨야 한다. 문장기(文章氣)를 벗겨야 참 글이 된다는 원중랑(袁中郞)의 말이 옳다. 그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려야 한다. 여러 번 손질을 해야 한다. 그러면 속에 있던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枾雪)이 앉는다. 만일 덜 익었거나 상했으면 시설은 앉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 혹은 납작하게 혹은 네모지게 혹은 타원형으로 매만져 놓는다. 이것을, 곶감을 접는다고 한다.

 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곶감이라야 오래 간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다. 곶감의 시설은 수필의 생명과도 같은 수필 특유의 것이다. 곶감을 접는다는 것은 수필에 있어서 스타일이 될 것이다. 즉 그 수필, 그 수필마다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면 곶감의 시설(枾雪)은 무엇인가. 이른바 정서적·신비적 이미지가 아닐까. 이 이미지를 나타내는 신비가 수필을 둘러싸고 있는 놀과 같은 무드다. 수필의 묘는 문제를 제기하되 소설적 테마가 아니요, 감정을 나타내되 시적 이미지가 아니요, 놀과도 같이 아련한 무드에 싸인 신비로운 정서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