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수필 어느 자리에 있는가 / 안재진


문단 일각에서는 오늘날 한국 문학의 위기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는 문학의 종언을 주장할 만큼 심각하게 문학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전망하기도 한다. 물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일부 층의 작은 목소리지만 결코 허튼소리로 지나칠 일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그만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라 해도, 한 번쯤 우리 문학의 현주소를 되짚어 보고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우리를 어지럽게 하고, 무엇이 우리의 미래를 가로막고 있으며, 우리는 어떤 길을 어떤 자세로 고민하며 가슴을 앓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으면 우리 문학의 위기는 결코 몇몇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반드시 거대한 무게로 짓누를 것이라는 예감을 떨칠 수 없다. 더구나 문학의 추락은 곧 인간정신의 추락이요, 삶과 영혼의 기저가 흔들리는 중대한 위험신호인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인문학의 모태요 기둥으로 인간이 인간다운 길을 모색하는 생명의 원천이며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개되는 사정은 그렇지 않다. 문명이 조여 오는 거대한 힘 앞에 문학의 입지는 설상가상이 되고 있다. 활자매체로 익숙했던 눈빛은 어느 사이 전파매체로 이동하였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입지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문학인이 되어 모름지기 대중 속에 빼앗겨 이미 문학의 권위가 상실된 처지에 이르렀다. 더욱 답답한 일은 작가가 독자요, 독자가 작가인 웃지 못 할 현실로 독자층이 등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문화산업이란 말이 범람할 정도로 문학을 포함한 예술 활동을 경제논리로 인식하려는 사회구조가 문학을 슬프게 한다. 원래 산업이란 기술과 자원, 지식과 지배가 작용하는 지극히 전략적인 통치개념의 인위적 이데올로기 산물이다. 그런데 보다 높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고 미적 우주관을 탐색하는 정신적 본령을 어떻게 하학적 삶의 지배 속에 귀착시킬 것인가. 설령 문학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해하더라도 문학은 여전히 현실에 대한 최후의 감시자이다. 즉 심미적 이성을 통해 사회적 인간적 문제를 해결하고 이에 유토피아적 잠재력을 부과하여 그 주도력을 사회에 환원시키는 절대적 명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문명이 몰고 온 새로운 세상사에 대응할 준비는커녕 작가가 사회를 인도하는 게 아니라, 독자가 요구하는 취향을 쫓아가고 끌려가는 인상을 떨칠 수 없다.

 

더구나 문학 중에서도 수필장르의 허실은 더욱 크게 보인다. 하기야 태동부터 불안하게 출발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문학이 픽션을 통해 새로운 질서와 바람직한 이상세계를 모색하는 작업이라면, 수필은 허구를 배격한 자전적 삶과 사상을 통해 문학의 영역을 찾는 것으로 대부분 인식하고 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이율배반적 문학관이다. 거기다가 초기 이론가들이 펴 놓은 수필 이론을 보면 한결같이 문학이론과는 상반되는 내용이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 '청자연적이나 학 같은 글', '무형식의 글 '같은 것이 그 예다. 아직까지도 무슨 금과옥조처럼 이를 기리며 새로운 가설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30년대에서 40년대에 이르러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한 면면을 보면 대부분 시인이거나 소설가들이었다. 물론 이 무렵 문단 분위기는 장르에 국한되지 않았던 특성도 있었다. 당시 중요인물로는 김진섭, 피천득, 이병기, 이희승, 박종화, 김소운, 이은상, 김광주, 모윤숙, 한흑구, 이양하, 노천명 등이었다. 이들 중 김진섭, 피천득, 한흑구 등은 수필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하였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문적인 길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 때문에 '여백의 글'이라는 조금은 비하적인 장르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의사, 변호사, 기업인, 연예인등 전문적인 직종에 있는 사람들이 신변잡기나 생활명상을 수상집이란 명제로 출간하면서 은연중에 붓 가는 데로 쓰는 글임을 고착시키는 꼴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이론 바탕이나 방향 설정이 부실한 가운데도 수필가의 양적 팽창은 50년대 70년대를 거치면서도 계속 되었다.

 

한때는 이어령, 곽종원, 안병욱, 박문하, 김태홍, 김형석 등이 서구 지성의 목소리로 대변되는 에세이 풍류의 작품집이 출간되면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가 했으나, 끝내 '붓 가는 데로 쓰는 무형식의 글'이란 완고한 논거에 밀려 수필의 자리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늘의 상황은 어떠한가. 현재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된 수필가는 3천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수필전문지 30여 종을 비롯하여 수많은 종합문예지들이 달마다 계절마다 등단시킨 작가들을 포함하면 어림잡아 4천여 명이나 될 것 같다. 이렇듯 수필가 양산시대에 일부는 충실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 수필문학의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 있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작가라는 허명에만 안주하며 수필문학의 위상을 저해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일은 잡지사의 역할문제다. 문학이 인간의 정신문화를 함양하는 것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순수성이 있어야 한다. 물론 잡지의 양적 팽창이 수필문학의 지평을 넓힌 공헌은 인정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폐단 또한 적지 않다. 잡지를 이용하여 경제수단으로 응용하다 보니 더 많은 습작이 요구되는 지망생까지 무차별 등단시켜 무슨 사사로운 조직처럼 집단화하여 문학적 의지보다는 동인모임으로 세력화하여 객관적 입장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또한 수필 강좌라는 형식으로 백화점, 도서관, 지방자치행정기구, 심지어는 대학에서까지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수강생 대부분이 주부들이다. 이런 현상을 굳이 나무랄 일은 아니지만 과연 얼마만큼 자질 있는 강사들이 강단을 서 있느냐하는 문제다. 도박판에 자금만 있으면 아무나 끼어 들 수 있는 것처럼 전문성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강단을 점령하고 이에 굿판보다 젯밥에 관심을 보이는 잡지들이 야합하다보니 언필칭 역량 있는 작가의 출현은 기대할 수 없다. 이러다 보니 과거에는 그래도 지식인들이 수상집을 출간하면서 붓 가는 데로 쓰는 글로 인식되게끔 하였으나, 근래에는 한 집 건너 수필가가 있다고 풍자될 만큼 어지러운 형국이 되어 사회적 질책을 받고 있다.

 

이제 수필가 스스로가 고뇌하며 행동해야 한다. 기왕 팽창된 양적 생산을 질적 생산으로 바꾸고, 수필가로 행세하며 잡지를 무기로 불합리를 일삼는 이익패거리는 무섭게 충고해야 한다. 만약 문학을 위한 잡지출간이 거북스럽다면 수필문단의 미래를 위해 문을 닫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당당한 미래문학으로, 독자가 선호하는 가장 유용한 문학으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 그런 날을 기대하며 새로운 해를 맞았으면 한다.

 

 

안재진(수필가. 시인)
한국문협 이사, 국제펜클럽 회원
한국육필문학회 회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수비작가회 회장 역임
신곡문학상, 수비문학상, 황의순문학상 수상
저서 : 《알다가도 모를 세상이외다》, 《여보게 좀 쉬어 가자구나》,
《산 그날에 가린 숨결》, 《뻐꾸기 소리》외 시집 기타
 

 

출처 :수필과비평 작가회의 원문보기▶   글쓴이 : 박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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