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고민

 

 

 

신순희 

 

 

다시 일상(日常)이다. 시애틀은 어제 살얼음이 얼었다.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했다. 엘에이 야자수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을 할까? 따뜻한 마음들이 있는 곳, 천사의 도시니까 장식이 따로 필요 없겠다. 문학 세미나의 열기를 생각하면 이번 겨울은 훈훈할 것 같다.

 

흔들리는 마음 끝에 ‘에세이데이’ 문학 세미나에 참석했다. 만사 제쳐두고 가도 될까? 갑자기 교회에서 추수감사절 에배를 한 주 앞당긴 것도 걸렸다. 한편으로 이번 기회에 지면으로만 알던 재미수필 회원 여러분을 만나고 싶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 교수님의 강연이라는데, 엘에이는 가 본 적이 없는데…..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아 문학을 좋아하는 후배 박미리에게 넌지시 말을 꺼내니 의외로 단번에 동행하겠다고해서 고마웠다. 

 

따뜻한 마음들이 모였다. 11월 중순이지만 엘에이는 따뜻했다. 타주에서 왔다고 특별대우를 받았다. 공항에 나와주시고 한인타운을 소개해주신 김영애 부회장님, 어떤 일이든지 흔쾌히 해결해주신 성민희 회장님, 매번 뒷일을 정성껏 해주신 성영라 선생님, 그리고 마지막 날 만남에서 문학에 대한 좋은 정보를 주신 조옥동 선생님, 재미수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신 조만연 선생님, 모든 분들이 도와주셔서 감사하다. 빈손으로 가서 받기만 했다. 로텍스 호텔 행사장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회를 보신 이화선 선생님과 뛰어난 유머 감각으로 막간을 이용해 좌중을 휘어잡던 김화진 선생님, 신명나는 장구 연주를 하시던 여준영 선생님, 뒷자리에 앉아 계시다 이 풋내기의 주문에 선뜻 수필집을 내주신 유숙자 선생님,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던 최숙희 선생님…..안타깝게 인사 드리지 못했지만, 그날 애쓰시던 모든 분들 잊지 못할 것이다. 특히 회장님은 행사로 바쁘고 피곤할텐데 끝까지 지친 모습 보이지 않고 힘든 순간도 침착하게 대처해 나를 감동시켰다. 같은 시애틀에 살면서 한번도 뵙지 못한 어른이신 이경구 선생님을 만나 기뻤고, 알래스카에서 오신 온동네방 반장 김태수 선생님을 만나 반가웠다. 통증을 시로 승화시키는 강화식 시인님을 만나 한 수 배웠다. 워싱턴 문인회에서 오신 세 분과 함께 밥도 먹었다. 임 교수님이 강의하신 ‘인간학의 총체가 문학이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이것이 모두 ‘에세이데이’ 덕이다. 이제야 재미수필의 한 가족이 된 기분이 들어 스스럼없어졌다.   

 

세미나는 뜨거웠다. 강사와 수강생이 하나가 되었다. 잠을 설친 탓에 졸지 않을까 염려한건 기우였다. 임헌영 교수님은 적절한 유머를 구사하며 고전문학부터 중국과 일본 문학까지, 일리어드 오딧세이, 그리스 신화, 서양철학, 톨스토이 그리고 박경리까지. 강의는 종횡무진으로 거침없이 누볐다. 오랜만에 고전문학을 대하니 옛날 생각이 났다. 두꺼운 책 뚜껑 안에 이단으로 나누어진, 세로 줄로 쓰여진 깨알 같은 글자를 읽던 그때의 감성이 되살아났다. 요즘 십대 아이들도 고전을 즐겨 읽을까? 또한 임 교수님은 성(性)의 자유와 윤리에 대해 ‘채털리 부인의 사랑’부터 에리카 종의 ‘날기가 두렵다’ 더 나아가 공지영의 ‘조용한 나날’까지 언급했다. 내가 스무 살 넘어 ‘날기가 두렵다’를 읽었을 땐 놀랍도록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써내려간 여자의 성에 대해 당시 서양에서는 흔한 얘기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파격적이었다는걸 지금 알게 되었다. 

 

이틀째 강의 때는 꼬박 여덟 시간을 들었다. 나중에는 의자에 엉덩이가 배겼지만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에 자리를 뜰 수 없어 화장실 가는 것도 참았다. 임 교수님은 그 짧은 2박3일 동안 얼마나 많은 정보를 넣어주려 했는지, 재미수필의 수준을 높이 평가하신게 틀림없다. 시애틀에서 비행기 타고 엘에이까지 오길 잘했다. 비록 듣고 다 잊어버린다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시간 만큼은 가슴 벅찼다. “인간에 대하여 써라. 휴머니즘을 보여줘라. 신변잡기도 필요하다. 철학적으로 풀어라.” 이것만 기억해도 나에겐 큰 소득이다. 

 

이제 수필 쓰기가 더 어려워질 것 같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면 내 맘대로 쓰겠는데, 고민 좀 해야겠다. 행복한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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