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표현과 형상화/변해명

 

 - 수필 쓰기의 언어 선택을 중심으로 -

 

                                                                             

글을 만드는 언어들

 

나는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무엇이 일상어로 하여금 그 언어 사용을 문학이게 하는가’라는 말을 되씹게 된다.

우리가 쓰는 어떤 성격의 문학작품도 일상어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문학이 일상어의 질서와 현실적 기능이나 효과의 범주 안에 놓인다면 아무리 좋은 언어로 글을 쓴다고 해도 문학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어떤 사람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정서적인 뉘앙스를 첨가하려 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상응하는 비유나 함축적인 언어로 상대방이 자신의 사랑에 공명하고 감동하기를 바라는 방법으로 언어를 동원할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사랑하던 사람과 관계를 청산하려고 한다면 그런 표현과는 달리 되도록이면 그 이유를 엄정하고 정확하게 문맥에 따라 다른 의도로 해석되지 않도록 객관적이고 논리가 타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가 지닌 양면성을 보게 된다.

 

일상 언어와 낯선 언어

 

작가가 작품을 쓴다는 것은 자기만의 언어용법으로 주관적인 심상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정서적 효과가 있기 위해 암시적이고 주관적이고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하려고 일상어의 의도적인 변용을 시도한다. 그런 언어들로 이미지를 구축하려 하고 독자에게 그 대상과 관련된 여러 가지 관념들을 연상시키는 상상력을 유발하려고 한다.

러시아 형식주의(1920년대 성장했던 문학비평의 한 학파) 비평가들은 문학적 언어와 일상 언어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있다.

일상적인 언어가 간단해지려는 경향을 갖고 있고 그 언어행위가 습관적이고 자동화되고 있는 반면 문학적(시적) 언어는 단순해지기를 거부하고 그 언어행위가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배격한다고 말한다.

슈클롭스키(Victor Shklovsky)는 이른바 낯설게 하기(making strange)가 모든 예술의 중심 과제라는 견해를 강조했다.

 

작품의 형상화

 

화가는 모델을 자료로 사용할 때 자기 심상에 따라 캠퍼스에 나타내듯 작가가 일정한 의도에 따라 주관에 의해 변형한 표현은 사실의 영역을 뛰어넘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작품의 형상화(visualization)를 위해서는 반드시 주관과 상상의 개입이 따른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예로 들면, 메밀밭의 밤 풍경 묘사의 한 대목은 소설임에도 시적 정서와 함축적인 언어가 풍기는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 작품은 남녀간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친자 확인(親子確認)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기본 줄기를 이루는 소설이다.

늙고 초라한 장돌뱅이 허생원이 20여 년 전에 정을 통한 처녀의 아들 동이를 친자로 확인하는 순간이 ‘푸른 달빛에 젖은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밤길’ 묘사로 압축되어 있다. 장돌뱅이를 생업(生業)으로 살아가는 허생원의 삶을 ‘긴 산허리에 걸려 있는 길’로, ‘소금을 뿌린 듯한 숨이 막힐 지경의 메밀꽃’은 허생원이 동이의 왼손잡이를 통해 아들을 확인하는 환희의 순간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괴로운 삶의 역정의 현장과 자연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정취가 짙게 풍겨 나오는 대목이다. 만약 이 소설 속에 위의 문장이 없었다면 한 늙은 장돌뱅이의 삶 속에 담긴 사랑의 추억과 인연(因緣)의 끈질긴 회한이 운문적(韻文的)인 몽환(夢幻)으로 독자의 기억 속에 남겨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작품을 정서적으로 형상화한 메밀꽃의 매력도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쓸 때에 자신의 의도를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따라 문학성을 지니게 된다.

 

수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수필도 자신의 체험을 자신의 의도가 담길 수 있도록 형상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작품이 된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어서 희게 내린 긴 서릿발이 길섶 마름 풀 위에서 서슬이 빳빳했다. 소년이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반 뜀질로 몇 걸음 걷다가 풀썩 주저앉고 다시 발딱 일어나 몇 걸음 달리곤 하는 그런 걸음새를 되풀이하면서 다가왔다. (중략) … 소년의 홀어머니는 가끔 쇠된 목소리로 소년을 꾸짖어 내쫓곤 했는데 (중략) … 쫓겨난 소년은 얼마 안 가 무심한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럴 때 소년은 어쩐지 실제 나이보다 두어 살쯤 들어보였다. 그래봐야 고작 열한두 살?

소년은 맨발이었다. 또 쫓겨났구나. 나는 눈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하듯이 소년이 웃고는 이내 누더기 앞자락을 조금 들쳐보여 자연스럽게 맨발로부터 내 시선을 끌어올렸다. “어마나!” 나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골무만한 새 새끼였다. 소년은 품에서 꺼낸 새 새끼를 조심스럽게 길바닥에 놓고는 나를 올려다보면서 싱긋 웃었다. 내내 소년은 그렇게 새를 날리고 따라잡고 또 날리며 온 모양이었다. 새 새끼는 어쭙잖은 날갯짓으로 마른 풀 위로 날아가 앉았다. 소년이 뛰어가 놈을 살풋 쥐어다가 다시 품에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그 봐, 발시렵지?” 그리고는 또 나를 보고 웃었다. 나는 가던 길을 되돌아서서 소년을 따라 걸었다.

얻어 입은 단벌 학생복으로 사철을 나면서도 정작 학교 문전에도 못 가 본 소년. 그래도 휘파람을 잘 부는 소년. 자기는 맨발로 서리를 밟으면서도 작은 새를 깊이 품는 소년. ─ 난호 수필 『서리 밟던 소년』 중에서

 

위의 수필을 읽으면 ‘문학의 언어만이 가지는 특이한 구조’를 생각하게 된다. 한없이 외로운 소년, 언제나 병든 홀어머니에게서 쫓겨나고, 신발도 없이 맨발로 서리를 밟으며 길을 가고, 학교는 가보지도 못하면서 사철 교복을 입고 사는 소년과 만난다. 그러나 이 글 속에서는 그래서 외롭고 불쌍하고 헐벗은 소년이라는 문장은 하나도 없다. 대신 가슴에 품은 새 한 마리를 통해 소년의 외로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새를 품으며, ‘그 봐 발시럽지’라고 하는 소년의 말로, 맨발로 서리를 밟고 있는 자신의 발시려움을 대신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맨발로 서리를 밟아도 휘파람을 부는 소년’은 우리의 잡다한 일상의 고뇌쯤은 우습게 만들어버린다. 글 속에서 서리 밟는 소년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품에 안기는 새 한 마리’로 전이되어 다가온다.

이 글의 필자는 자신이 바라본 사실을 사실대로 쓰고 있지 않다. 사실을 뛰어넘어 인간의 외로움의 보편성을 개성적인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일상어로 하여금 그 언어 사용을 문학이게 하는가.’

우리는 작품을 쓸 때 언어의 감옥에서 일상어의 탈출을 시도해 봄직하다. 그것이 작품을 작품답게 형상화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