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열망과 좌절
배나무가 없는데 마을 사람들은 우리 집을 ‘배나무 안집’이라 불렀다. 은은한 배꽃향기가 그해는, 유난스레 짙었다.
뜰을 출렁이는 배꽃향기 사이로 달빛이 함박눈처럼 쏟아질 때, 다섯 살배기 아이는 잠도 안 자고 툇마루에 앉아 밤새 울기만 했다. 아버지는 다음 날 동티가 났다며, 아름드리 배나무를 베어버리고 고사를 지냈단다.
그날 밤, 그 아찔하고 아득했던 순간 때문에 평생을 방황하고 허둥대며 살았다. 그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미혹(迷惑)과 열망이었다. 알 수도, 채울 수도 없는 ‘목마름’에 헉헉거리며 여기까지 왔다.
예술가는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에, 잘난 것보다는 못난 것에, 귀한 것보다는 하찮은 것에,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또한 환희보다는 쓸쓸한 것에, 굳건한 것보다는 흔들리는 것에,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에, 손길을 내민다.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전자를 아니무스(animus), 후자를 아니마(anima)라 할 수도 있는데, 천성적으로 모든 인간과 사물에 무정할 수 없는 예술가의 성정은, 당연히 아니마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귀 기울이리라. 그래서 예술가는 항상 아프지 않을까.
예술가적 심성이 갖춰지는 게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건지, 후천적으로 학습(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감성지수가 특별히 높은 사람이기에 공감 능력이 뛰어나, 이웃의 불행에도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매우 안타까워한다는 것이다. 고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다섯 살배기 아기가 무엇 때문에, 어쩌자고,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을까?
그래서 그런지 중학교 이 학년 때 문학에 눈을 떠, 국문학을 전공하고, 대학 3학년 때, 시인으로 등단했다. 물론 소질이 없어서 그냥 묻히게 되었지만, 그런데도 나의 정체성은 시인이며 예술가여서 삶 자체가 괴로웠다.
약한 몸과 집중력 장애가 있으면서, 방대한 양의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늘 시달렸다. 작가가 지적으로 시대와 호흡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에, 편할 날이 없었다. 특히 문과 출신이 현대물리학이 갖는 철학적 함의 때문에 ‘상대성 이론’, ‘엔트로피 법칙(열역학 제2법칙)’, ‘양자역학’을 공부하는 데 애를 먹었다.
글 쓸 대상을 포착하는 것은 감성이지만, 이것을 해석하고 풀어내는 것은 독서량이 절대적이다.
내가 작가로 성공하지 못한 첫 번째 이유는, 학습량의 절대 부족이고 두 번째는, 예리한 감수성의 부재고 세 번째는, 상처로부터의 도피다.
세상일이란 게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 것이 이치다. 내가 아무리 작가란 정체성이 강해도, 거기에 걸맞은 독서량과 감수성이 따라주지 않았으니,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평생 되지도 않으면서 뭔가를 쓰기 위해선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강박은, 나를 예민하고 괴팍한 늙은이가 되게 만들었다. 예순넷이 되도록 뭐 하나 제대로 쓴 게 없다. 고로 내 일생일대의 오류는 문학을 전공했다는 데 있다. 나는 그저 문학 감상자로서 애호가로서 적합했던 인물이지, 문학 생산자로서는 함량 미달이었다.
그럼에도 매일 절망하면서 일평생을 문학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별짓을 다 해도 문학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상처에서 나온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행위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상처로 빚는다는 것을, 미학(美學)을 공부하며 배웠다. 그냥 아름답기만 한 건 예술품이 아니라 장식품이다. 장식품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심장을 울리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의 깊은 상처에서 나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운명”, 차이콥스키의 “비창”, 고흐의 “자화상”, 피카소의 “게르니카”, 조정래의 “태백산맥”, 최명희의 “혼불” 등등은, 상처에서 나온 빛나는 예술작품들이다.
예술이 아름다운데 슬픈 건 상처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반드시 인간에 대한 끝없는 연민과 존중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모든 예술은 감동을 준다. 그 감동은 지친 영혼을 위로한다.
궁극적으로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그 아름다움이 향하는 곳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어떤 아름다움도 탄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상처든, 공동체 상처든, 모든 상처는 아프다. 그게 과욕이나, 무지나, 과오에서 나왔든, 모든 상처는 고통스럽다. 상처를 외면했을 때 그 후유증은 엄청나다. 결국은 상처를 감내하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리라.
상처를 회피한다고 치유되는 법은 없다. 상처를 자세히 알고 이해해야만, 상처와 화해할 수도 있고 치료 방법도 모색된다. 아름답다는 것은,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이리라.
예술이 숭고한 것은, 상처의 괴로움과 슬픔을 견디며 길어 올린 정화수(井華水. 이른 새벽에 길은 맑고 정결한 우물물)이기 때문이다.
죽도록 후회하지만, 나는 사회적 상처에도, 개인적 상처에도, 비겁했다. 스무 살 때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친구들은 군인들에게 붙잡혀 가 고문받고, 군대에 끌려가도, 난 꼭꼭 숨어있었다. 어른이 되어선 커다란 실연의 상처가 있었는데, 책임을 다하기보다는 멀리 도망치기만 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배신이었으며, 저열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그 대가를 지금도 치르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상처의 감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회한만 남는다. 그렇다고 현재 인격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되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포용력이 없으며, 까탈스럽다.
남들에게 선뜻 보여줄 작품 하나 남기지 못했지만, 이조년의 시조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와, 공자 사상의 핵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인(仁)과 같은 예술가의 초상만은, 누가 알아줄 리 없지만 내 가슴에 또렷이 남아있다. 채울 수도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 때문에, 내 삶이 내내 아프고 외로웠지만 그래도 문학,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 하였네라”(유치환 “행복” 중에서)
지금도 진행형이 아닐까요. 지금도 좋은 글을 쓰고 있고 언젠가는 만족할 만한 글이 나오리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