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깊이”에 관하여
올겨울에는 플로리다에도 눈이 왔다. 우리 동네보다 북쪽에 있는 플로리다의 수도 텔레하시는 2인치가 넘는 눈으로 온 동네가 하얗게 덮였었다. 그렇게 눈이 쌓인 것은 1958년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눈이 오는 거리를 꿈결인 양 환희 가득한 얼굴로 뛰어다녔다. 눈이 오는 플로리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그 진기한 풍경 속에 자신의 시간을 담으려고 저마다 찰칵찰칵 바삐 움직였다.
우리 동네는 눈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기온을 영하 가까이 끌어 내린 한파에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거리에는 차가운 바람만이 외롭게 서성거렸다. 그 한파 끝에 난 독감에 걸렸다. 감기는 자주 앓았지만, 독감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목이 조금 아픈 것 같더니 곧바로 몸살이 왔다.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받은 것처럼 맥없이 쓰러져 이틀을 앓았다.
삼 일째 되는 날은 아침에 노란 별이 눈앞에서 어른거렸고 오 일째는 자다가 가슴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놀라 일어나 검색해 보니 폐에 끈적거리는 가래가 껴서 공기가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해 나는 소리란다. 의사를 만나고 엑스레이를 찍었다. 다행히 폐렴은 아니었다.
그렇게 열흘 넘게 앓고 나서야 겨우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퀭한 눈으로 집 밖에 나오니 앞마당에는 어느새 봄기운이 가득했다. 겨우내 앙상한 가지로 서 있던 목련 나무가 언제 봄물을 마셨는지 여섯 송이의 진홍색 목련꽃을 말갛게 피어 놓았다. 집 앞 모퉁이에는 우산을 활짝 펼쳐 놓은 모양의 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 모습이 단아해서 드나들며 자주 눈이 가던 나무다.
그런데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진분홍색이 눈처럼 나뭇가지를 소복이 덮고 있다. 매일 보던 나무가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이제야 새삼 알아차린다. 언제나 종종걸음으로 대충 보고 지나친 탓이다. 그간의 무심함이 미안해서 전화로 사진을 찍어 이름을 검색해 본다. 배롱나무란다. 백 일 동안 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고하여 백일홍이라고도 한단다. 네 이름이 배롱이구나! 배롱아. 이름을 불러본다. 꽃들이 방긋방긋 웃는 듯하다. 내가 감기를 앓는 사이 이미 한 무리의 꽃이 피었다 졌는지 나무 주위의 땅은 백일홍으로 가득 덮여있다. 마치 땅속에서 진홍색의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 주변이 꽃비로 젖고 있다.
앓다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센 감기를 앓고 나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늘 종종거리던 걸음을 멈추고 우선순위와 가치를 다시 따져본다. 수분 없이 건조하던 마음에 봄볕이 따사하게 들어온다. 내가 앓고 있는 사이, 아니 그전에도, 또 그전에도 한 폭의 수채화를 내 앞마당에 그려 놓고 봐주기만을 기다렸을 봄을, 그 마음을 헤아려본다. 이것 말고도 놓친 것이 있을 것 같아 주변을 찬찬히 돌아본다. 귀한 것을 잃은 줄도 모르고 앞으로만 달려갔던 지난날을 뒤돌아본다.
노란 봄볕에 눈이 부시다. 그 볕에 반짝이는 배롱나무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봄이 그려준 수채화에 나를 담아 본다.
이상은, 미주 한국일보 2025-03-20(목)에 발표된 수필가 허경옥 선생님 글 “봄은 벌써 와서” 전문이다.
다음은 필자의 졸작 “서울. LA,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일부다.
“올해도 어김없이 꽃이 피려고 팥알 만안 싹이 나무 끝에 맺혔던 게 엊그젠데, 어느새 꽃이 활짝 피었다. 신비롭다. 복숭아는 작년에 처음 먹어 봤는데 달고 맛있었다.
작은 씨, 그 씨앗은 끝내 터서 나무가 된 것이다. 땅속에서 주변 상황과 섬세하게 교감한 결과다. 비. 바람. 햇빛과 교섭이 안 되면 클 수 없기 때문이다.
씨앗은 우주를 호흡하는 존재다. 겉은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수 없이 딱딱하고 강건하지만, 안은 천체 모두를 느낄 만큼 예민한 촉수를 가졌기 때문이다. 강함과 부드러움의 이질적인 요소를 가진 완전체.
씨앗은 속에 안드로메다의 수많은 별빛, 새소리, 대나무 소리. 달그림자, 기차 소리, 애기 살냄새, 오이 향기,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등등을 진공포장 지에 압축시키듯 축소 시켜, 넣었을 것이다. 그 큰 것들을 다 담아 아주 작게 만들어 돌처럼 단단한 외피로 감쌌을 것이다. 그러나 흙으로 돌아가면 자기 몸을 썩혀 이것들을 아낌없이 내놓고 열매로 변한다.
봄날, 내가 본 예쁜 복숭아꽃은 아득히 먼 행성의 소녀 눈빛이며, 내가 먹은 복숭아는 나비의 춤사위일 것이다. 내가 복숭아를 먹은 것인지, 복숭아가 나를 먹은 것인지, 모를 일이다.”
두 작품 다 봄의 서정이랄까, 봄의 정서를 그렸다. 단순화시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보이는 것만 형상화했고, 후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형상화하려 했다. 여기에서 전자와 후자의 ‘사유 깊이’가 차이 난다고 할 수 있다. 전자의 사색이 표피적이라면 후자는 본질을 파고들려 한다. 불가지론자든 아니든 작가는 사물의 근본을 꿰뚫어 보려는 최소한의 노력(인간적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는 사물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입장이다.
작가의 시선(상상력)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보이는 것을 볼 수 없어야 한다.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처럼 말이다. 깊은 사유와 상상력은 이음동의어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수필에서 소설과 같은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봄은 벌써 와서”는 특별히 흠잡을 데 없는 단정한 글이다. 그럼에도 신변잡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용면에서 문학성을 논할 만큼의 ‘새로운 아름다움’이나 ‘깊은 통찰’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눈길을 끌만 한 미학성과 철학성이 확실하게 가미될 때 문학으로서의 수필이 된다. 글이 단정하다 하여 문학이라 말한다면 난 동의하기가 어렵다.
신변잡기에 미학성과 철학성이 미미한 것은, 글에 대한 치열성이 부족한 결과다.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의 아름다움은 철학성에 기반한다. 철학성을 담보하기 위해선 인문적 교양이 필요하다. 인문학 지식은 세계를 이해하고 읽어낼 수 있는 도구(tool)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끝없이 공부해야 한다. 고전과 신간을 부지런히 읽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작가만큼 지적 정보에 의존해야 하는 예술가도 없을 것이다.
개인적 문학 강의에서나 할 만한 얘기를 민망함 무릅쓰고 했다. 이런 나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꼰대질이나 아는체로 비쳐지질 않길 바란다. 나의 이의 제기가 의미 있는 도발이나 도전이 되길 희망한다.
나의 어쭙잖은 글이 허경옥 선생님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잘 안다. 부디 용서를 빈다.
“글을 마쳐야 하겠다. 나의 해석(관점)이 바르다는 소리는 아니다. 동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나같이 읽을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필자의 졸작 “합평작” 마무리를 빌려와 글을 갈무리한다.
"작가는 끝없이 공부해야 한다"에 동의합니다.
사르트르 <구토>에서의 실존주의를 고려해보면 어떤 공부인가가 관건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유 깊이'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배롱나무의 매력은 알고 있답니다.
곧 피게 될 그 꽃이 유난히 기다려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