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 / 김혜주

 

되돌릴 수도, 늦출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시간은 항상 나를 애태우게 한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도 가뭇없이 휘발되는 그것은 나의 얕은 기억 속에만 쌓인다. 스치듯 빠져나가 버리는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쓸 때마다 나는 ‘곁’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불안이 조금 누그러지고 왠지 겨드랑 안쪽으로 끼어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802호 할머니가 실버타운으로 입주한다고 했다. 같은 아파트에 살았고,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나누던 이웃이었다.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작별 인사를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반갑게 할머니를 껴안았다. 등이 굽은 할머니는 두 팔을 나의 겨드랑이 사이로 휘감은 채 등을 다독여 주었다. 수줍게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동안 한 꺼풀의 서먹함을 ‘곁’이라는 감정으로 밀어냈다.

‘할머이 혼자 살아요. 신문 넣지 마시라요.’

현관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쓴 종이가 붙어있었다. 누런 걸로 보아 오래전부터 붙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할머니는 ‘바흐’라고 부르는 강아지를 키웠다. 간간이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강아지를 품에 안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퇴근길에 어둑한 복도를 지날 때면 바흐 할머니의 불 꺼진 창을 자주 쳐다보았다. 해가 져도 찾아올 사람 없는 할머니의 집은 고요하고 어두웠다. 컹컹대며 짖는 바흐의 소리조차 흐릿하고 힘이 없었다.

지은 지 50여 년이 다 된 아파트라 그런지 연세 드신 분들이 많이 산다. 바흐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꺼내던 레퍼토리가 있다. 한평생 살아낸 사람만이 언급할 수 있는 실향이라든가, 한국전쟁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들을 때마다 역사는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개인의 삶이었다는 걸 나는 깊이 깨닫는다. 슈퍼에 가다가도, 복도에서 만나도 바흐 할머니 이야기를 듣는다. 아파트 현관 입구 제일 후미진 자리에 나이 지긋한 경비아저씨가 앉아있다. 그 흔한 자동문도, 비밀번호를 대라는 번호판도 없다. 손때 묻은 엘리베이터 버튼처럼 경비아저씨는 한 평도 안 되는 비좁은 공간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의 곁을 지키며 인사를 건넨다.

언제부턴가 실버타운 광고지가 우편함에 자주 등장했다. 그곳은 나이 든 사람들이 살기 편하게 꾸며져 있었다. 식사, 빨래, 운동, 재활이 제공되는 곳, 그 부분에서 내 귀가 솔깃해졌다. 집안일에 지칠 때마다 꿈꾸던 공간이었다. 화장실에는 낙상 긴급 호출 버튼이 달렸고, 보너스로 입주자들에게는 위치 추적 손목시계를 제공한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할 것이라고. 기꺼이 당신의 곁이 되겠다는 달콤한 제안이 광고지 안에 빼곡했다.

할머니가 떠난다는 날이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지도 못하고 나는 바삐 출근길에 올랐다. 어쩐 일인지 종일 손에 일이 잡히질 않았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래 지냈지만, 미처 할머니와의 이별을 예상 못 했다. 알게 모르게 할머니는 내게 도톰한 그늘이 되어준 분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느꼈다.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이었다. 재개발 현수막이 펄럭이는 아파트 입구에 이삿짐 트럭이 서 있었다. ‘누가 이사 하나’ 기웃거렸더니 경비 아저씨가 달려와 아는 체한다.

“8층 할머니는 가시고 짐은 업체에서…….”

“아, 배웅도 못 했네요.”

아쉬움이 묻어나는 나의 대답에 아저씨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물끄러미 서서 그 광경을 보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복도에는 할머니 먼 친척뻘이라는 낯선 청년이 분주하게 사다리차로 짐을 내리고 있었다. 이미 떠나셨는지 어디에도 바흐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정리업체 직원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둘과 아저씨 두 분이 부지런히 짐을 날랐다. ‘해마다 장 담으면 작은 병에 나눠 주시곤 했는데…’ 복도에 놓인 항아리 몇 개와 소금 한 자루가 유독 내 눈에 밟혔다. 미처 뜯지도 않은 그릇 상자나 빛바랜 개업 선물도 보였다. 거저 준다고 해도 가져가지 않을 묵은 것들이지만 오래 할머니의 곁에 함께한 물건들이었다. 소금 자루와 항아리 서너 개를 사다리차에 실어 보내고 청년은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

현관문을 열려고 하니 손잡이에 비닐봉지가 매달려 있다. 뭔가 들여다보니 주황색 귤 몇 개 속에 쪽지가 보였다.

“곁이 돼아서 고맙수다레.”

바흐 할머니가 떠나면서 놓고 간 모양이다. 집 안으로 들어와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베란다 앞에 선다. 밖은 찬바람 불지만, 햇살 받은 동백나무에 꽃망울이 맺혀 있다. 나는 귤을 꺼내 들고 양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찔러 넣는다. 희한한 일이다. 차갑고 딱딱했던 귤이 시간이 흐를수록 말랑해진다. 귤과 나 사이에 면역이 생긴 거다. 누구에게 곁을 내준다는 일은 자신의 시간을 내놓는 일이다. 안달복달 조급하게 분초를 다투었던 내 모습이 스친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 다가와 내게 이웃이 된 할머니에게 갚지 못할 빚을 진 셈이다. 천둥벌거숭이로 서울살이 하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점이다. 나는 입김을 불며 귤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하나가 둘이 된다. 여럿이 겹친다. 알갱이가 톡톡톡 입안에 수없이 쏟아진다. 춥고 서운했던 마음이 그제야 따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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