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맛을 안다는 것 / 윤혜주
무 맛을 알았다. 아무 맛 없다고 타박했던 그 맛을 이순에야 알았다. 땅심 먹고 자란 식물 중 가장 자연적인 그 맛을 내 입이 알기까지는 참으로 오래 걸렸다. 편안하게 입안 가득 수분을 채워주다 천천히 제 몸을 우려내 주재료에 어우러져 드는 착한 맛. 누구나 만나지 못해도 늘 마음 언저리를 채우는 사람이 있듯, 어떤 맛에서도 일인자의 자리를 넘보지 않는 어련무던한 맛.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른 이에게 조용히 베풀면서 행복해하는 그런 사람 같은 무 맛을 안다는 건, 인생의 오감을 느낌으로 마주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증거리라.
땔감 준비와 움을 파는 것으로 아버지의 겨우살이 준비는 시작되었다. 겨울이면 내 유년의 텃밭엔 크고 작은 움들이 하얀 눈 봉우리를 하고 올망졸망 앉아 있었다. 날것의 갈무리가 마땅찮았던 시절, 움은 겨우내 주식인 밥을 거드는 찬거리의 저장고인 셈이었다. 주로 볕 바른 텃밭 한 편에 땅을 파 바닥과 둘레에 짚을 두툼하게 깔아 둘렀다. 사람 팔뚝이 들락거릴 만큼 움의 숨구멍을 만들어 표시한 뒤, 헤진 멍석 조각이나 짚, 흙을 덮어 보온했다. 가을걷이 뒤 챙긴 실한 무나 배추, 감자나 고구마 같은 것들을 보관해 엄동설한에도 날것을 먹기 위해서였으니 부엌의 어머니에겐 유용한 식재료의 보고(寶庫)였다.
겨울이 깊어지고 고방의 양식도 바닥을 보일 즈음, 밥상엔 맷돌에 대충 갈아 껍질 벗긴 완두콩 밥과 무 찬이 단골로 밥상에 올랐다. 싸락눈 싸락싸락 치는 긴 밤이면 아버지는 발자국을 찍으며 텃밭으로 향했다. 하얗게 수염발을 단 무를 담아 들고 와 깎은 뒤, 아랫목에서 뒤척이는 우리 손에 일일이 쥐여주곤 하셨지만 나는 자는 척 받지 않았다. 간혹 오일장 나갔던 할아버지가 들고 온 꾸덕꾸덕 마른 명태에 큼직하게 썰어 넣은 무에도 손이 가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움 옆에 묻어둔 항아리에서 꺼낸 시원한 동치미 국물은 들이켜면서도 서걱거리는 무의 식감과는 좀체 가까워지지 못했다. 그러나 가을 무는 겨울철 비타민 공급과 소화 촉진에 도움을 주는 영양적 효능이 뛰어나 인삼보다 낫다는 식재료였다. 단지 맛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내 입에서만 데면데면했을 뿐이었다.
군것질거리가 궁했던 시절, 가끔 어머니는 통무를 얇게 썰어 데친 후 밀가루 반죽을 입혀 지져내 주셨다. 들기름 바른 무쇠 솥뚜껑에서 부쳐낸 무전 또한 들기름의 고소한 맛뿐 특별한 맛은 느낄 수 없었다. 고구마전처럼 포슬포슬 달콤하지도, 배추전처럼 부드러운 식감에 쫀득하지도 않았기에 입안에서 뱅뱅 겉돌다 마지못해 억지로 삼키거나 뱉어내기 일쑤였다.
그나마 살아가면서 자극적인 맛에 길들어지면서 무 맛은 점점 다른 맛의 영역에 밀려 잊히듯 존재감을 잃어갔다. 그러나 소중한 이들을 위한 절실함이 가미된 요리를 하면서 미처 몰랐던 재료 본연의 진미(珍味)까지 알게 되었다. 치아가 부실해 고생하는 남편과 소화능력이 떨어진 시부님을 위해 궁여지책으로 시작한 무 요리였다. 하면 할수록 맛과 효능에 깊숙이 빠져들면서 무슨 맛으로 먹는지조차 의아해했던 그 정직한 맛과 친숙하게 되었다.
살캉거리다 씹을수록 물컹해지는 순종적인 식감. 개운한 듯 담백한 맛. 마지막에야 여운처럼 내놓는 순박한 듯 건강한 맛. 치매로 거동이 제한된 시부님의 밥상에 무 찬을 자주 올렸다. 소화를 돕고자 채 썰어 들기름에 자작하게 볶아 새우젓으로 간한 무채 볶음을 시부님은 한 사발 들이켜듯 드셨다. 순하게 목구멍을 통과한 후의 편안함이 좋으셨던 모양이다. 숙성된 동치미의 아삭거림을 즐기며 아이처럼 헤벌쭉 웃으시는 표정마저 행복해 보였다. 더구나 한 줌 멸치와 푹 졸인 달큼한 무조림 몇 조각으로도 밥 한 공기 거뜬히 비우셨다. 가족의 입맛을 책임진 사람한테는 맛있게 먹고 짓는 그들의 행복한 표정만큼 보람된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참으로 고상하고 따뜻한 천연 해독제인 그 맛에 매료되었다.
삶은 이미지로 각인된다고 했던가. 행동의 결과가 모든 의미를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소소하게 쌓인 이미지에서 그 의미가 살아날 때도 있다. 순하면서 착한 듯 은근하게 다가와 슬며시 감기는 무 맛이 그랬고, 그 맛이 준 건강한 가족들의 얼굴빛이 그러했다.
나이 탓일까. 나는 요즘 돌솥에 들기름으로 볶아 지어낸 무밥을 즐겨 먹는다. 잘 여문 가을 무를 큼직하게 조각 내 고추장이나 된장에 박았다가 채 썰어 갖은 양념에 무친 찬을 자주 상에 올린다. 짭조름한 듯 고소한 그 맛 하나로도 식탁 앞이 행복해지는 건 왜일까.
삶이 팍팍하다. 나는 사람도 겉과 속이 같은 빛깔로 뭉근한 듯 오래 함께하는 무 맛 같은 사람이 좋다. 아픈 손이 아픈 손을 알아보고 왼손의 상처가 오른손을 일깨우듯, 한 사람 안에서만 맴돌지 않고 우리라는 다정함으로 다가오는 무 맛 같은 그런 사람이 많은 사회를 꿈꾼다. 큰 명예나 돈 같은 힘을 갖진 못해도 서로에게 다정하고, 존귀하지 못해도 최소한 다정함으로 가치 있는 사람을 무 맛 같은 사람이라 부르고도 싶다.
십 대 같은 순수한 맛에서 갈등과 흔들림의 긴 시간을 지나 마침내 이순에 참됨과 좋음을 알려준 귀한 맛. 무 맛을 안다는 건 단순함의 미덕과 인생의 진미(眞美)를 안다는 것. 인생의 숱한 맛, 그 너머의 맛을 안다는 것이고 조금은 외롭다는 것이기도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