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 노정옥
이월 개펄이다. 썰물이 쑥 빠져나간 뻘밭에는 온갖 산 것들이 꿈틀거린다. 늘그막의 아낙 두엇이 암석 군데군데 엉겨 붙은 석화를 허리 굽혀 따고 있다. 탁·탁·탁, 둔탁한 연장소리가 섣부른 봄을 서둘러 일깨운다.
남해안의 굴 가내 공장을 찾아 나선 길이다. 해안선을 따라 한참을 가다보면 한적한 길 끄트머리에 얼기설기 지어올린 판잣집이 나타난다. 언뜻 보아도 엉성하기 짝이 없다. 삐이걱, 출입문을 밀어젖히는 순간, 특유한 내음이 코끝에 와락 닿는다. 싸늘한 해풍만큼이나 살얼음이 낀 듯한 강철탁자 위에는 갓 따낸 석화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대충 헤아려보아도 족히 일흔이 넘었을 노부老婦들. 굳은 살갗만큼이나 두꺼운 옷을 겹겹이 걸치고 무릎까지 오는 고무장화를 신었다. 흡사 화생방 종사자나 소방수를 연상케 하는 여전사들 같다. 실내 기온이 바깥 온도와 다를 바 없다. 아마도 굴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인가 보다. 갱물이 절벅거리는 탓에 발이 시릴만도 한데, 한 손으로 석화를 틀어잡고, 연신 조새로 콕콕 찔러댄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도 넉넉하지 않은 나이인데, 은퇴 없는 노년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마음 한구석이 찡해 온다.
일정한 속도로 알이 떨어지는 손끝에서 단련된 세월을 읽는다. 세상 모든 것이 기계화 되어가지만 굴 까는 일만은 아직도 수작업을 벗어날 수 없다. 연장이라고는 송곳처럼 생긴 뾰족한 기구 하나 뿐, 그러다보니 노부의 거칠고 부르튼 손이 또 하나의 석화껍데기를 닮아간다. 단순하지만 끈기가 필요하기에 젊은 부녀자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오직 결핍과 한이 가득 찬 세월을 맛본 사람만이 감당하는 작업일 테다.
세상 참 많이도 젊어졌다. 자신의 나이에 10을 뺀 값이 신체 나이라고들 한다. 우스갯말 같지만 출생나이는 이제 주민등록 서류에서나 인정되는 숫자라고 할까. 그래서인지 여생을 스스로 책임지려는 노부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아직 남아있는 에너지를 끝까지 소모하려는 듯 차디찬 실내를 열정으로 덥힌다. 휴休와 지止의 노년은 옛말이 된지 오래다.
댕그랑 댕그랑. 돼지 저금통에 동전 떨어지듯, 알이 굴러 떨어진다. 한 양푼을 까면 귀여운 손주 눈깔사탕 사 주고, 두 양푼을 까면 바깥양반 막걸리 값 쥐어 주고, 세 양푼을 까면 며느리, 아랫동서 옷 한 벌 마련해 주려는가. 몇 양푼을 까고 까도 제 몫 챙길 줄은 모르지 싶다. 욕심이라고는 한 구석도 찾아 볼 수 없는 어진 마음씨를 생각하면 저들은 지금 굴을 까는 게 아니라, 석화에서 생의 진주를 캐내고 있는 것이리라.
굴은 거칠거칠한 바위 표면에서 시간을 붙들어 매고 자란다. 밀물과 썰물에 치이는 굴곡진 날을 보내며 여린 껍데기가 억세게 여물어갈수록 통실한 젖빛 알도 속속 차오른다. 달빛에 물들고 파도에 씻기며, 마침내 제 안의 빛을 뿜어내는 꽃이 된다.
석화는 돌에서 피는 꽃이다. 계절 따라 땅에서 피는 꽃들은 요란한 색감으로 뭇사람의 눈길을 끈다. 하지만 석화는 골주름처럼 쭈글쭈글하게 패이고, 축축하고, 거무데데하고 볼품 하나 없는 잿빛 돌꽃이다. 이름하여 ‘노부의 꽃’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
탁자 아래로 눈길을 돌린다. 까서 버린 껍데기 더미에서 제몫을 다한 세상 어미들의 허허로운 삶이 웅크리고 있다. 젊은 날 생명을 잉태하여 논바닥처럼 갈라 터진 뱃살 자국이 그렇고, 제 몸보다 더 소중히 자식 보살핀 세월이 그러하고, 몸의 진액을 다 빼앗기고, 제 몸 돌볼 줄 모르는 헌신이라 하늘이 내려준 마음에 비유했을까.
하나같이 한 쪽 다리를 어긋 세운 옆태가 알파벳 R자 위에 작은 동그라미 하나가 얹힌 형상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굴의 영문 철자인 OYSTER도 끝자리가 R로 끝난다. 그뿐인가. 생굴을 안전하게 먹을 수 있다는 달이 9월에서 다음해 4월, 이를테면 SEPTEMBER에서 APRIL까지는 모두 R이 들어있다. 굴과 R과의 인과성을 알 수는 없지만, 분명 둘 사이에는 오묘한 관계로 엮어진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싶다.
노부들을 보고 있노라니, 요즘 세상이 거꾸로 간다는 생각마저 든다. 은퇴가 지난 노인들은 아직도 힘든 일을 하고 있는데, 힘 있는 젊은이는 다들 어디로 갔을까. 자식에게 편안을 장려하고, 고생시키기를 두려워하는 기성세대의 탓으로 돌려야 할까. 아무려나 오늘의 노년들은 슬프지 않다. 얼굴은 주름살로 포진되고, 마른 장작처럼 몸은 굳어가지만, 내면에는 꺼지지 않는 내공이 응축되어 있다. 어렵고 궂은일은 전부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며 살았던 지난날이 그러했듯이.
때때로 나는 노동시장에서 일손을 구한다. 그럴 때면 당황스럽기보다 황당하다. 한결같이 칠십 줄의 늘그막에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다 운 좋게 젊은이를 구하더라도 얼마 못가서 근로계약서는 휴지통에 버려지기 일쑤다. 그 옛날 알타미라동굴 벽에는 젊은이를 탓하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요새 젊은이들이 너무 버릇없고 성숙하지 못해서 큰일이다. 미래가 걱정이다.” 이전 세대가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눈높이는 어쩔 수 없이 편향적인가 보다. 젊은 세대는 있어도 젊은이가 없다는 이 시대, 어느 에세이스트의 문구 한 구절을 떠올린다.
굴을 까는 동안 노부는 세월에 묻힌 꿈을 다시 캔다. 날쌔게 움직이는 손끝 아래로 함지박마다 생굴이 숭글숭글 차오른다. 샛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말랑한 여유와 인정으로 어깨를 나눈다. 짠 물속에서도 굳세게 알을 키워가는 석화처럼, 노부들은 외강내유의 기운을 가졌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터이다.
받아든 굴 박스를 들고 뒷문으로 나선다. 저 멀리 밀물이 야금야금 갯벌을 삼키며 다가온다. 허리 펼 줄 모르는 노부들의 등위에 햇살 한 움큼 살포시 내려앉는다. 비록 신체는 R자처럼 굽었지만, 열정은 I처럼 곧다.
노부老婦는 석화로 피어나고, 석화는 노부의 꽃으로 다시 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