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봄도 아니요. 여름도 아닌 계절이다. 푸르게 물들어 가는 세상이 싱그럽긴 하지만, '잔인한 4월'이니, '계절의 여왕'이니 하는 화려하거나 달착지근한 수식어도 없다. 좋게 말하면 무던한 달이고 나쁘게 말하면 나른하고 무미건조한 달이다. 그저 여둣빛 여린 잎들이 말없이 초록으로 짙어갈 뿐이다.
그런 6월의 오후 4시는 더더욱 어중간한 시간이다.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고, 마무리를 하기엔 너무 이르다. 이떄쯤이면 직장에 적을 둔 사람이나 집에서 살림을 하는 사람이나 약간은 심심하고 지루해진다. 긴장감이 해체되는 시간이랄까. 언제부턴가 나는 오후 4시를 쓸쓸함을 위한 묵상의 시간이라 칭하기로 했다.
6월이 막 시작된 어느 하루, 나는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다. 결혼 36년차인데 이사 경력이 무려 스물네 번째다. 복부인도 아니건만 어찌 된 연유인지 한곳에 진득하게 살지 못하고 수없이 터전을 옮겨 다녔다.
처음엔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와 설렘도 있었다. 그러나 횟수가 거듭될수록 별리의 아픔도 무뎌지고 새로운 곳에 대한 환상도 없어졌다. 이사에 대한 특별한 감회조차 사라졌다. 이사라면 눈을 감고라도 할 만큼 이골이 났다. 남의 집을 전세로 전전할 때는 서럽다 못해 약간의 비애감까지 들기도 했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그저 시간이 가면 다 정리되어 있으려니 하며 매사에 초월의 경지에 들었다. 이번에도 도와주겠다고 하는 언니의 제의를 가볍게 거절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이사는 역시 고단한 일이었다. 짐을 정리하는 시간보다 쉬어야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살던 집 보다 더 좁은 집이건만 치우고 치워도 끝이 없었다. 여름의 초입이라 그런지 더위조차 기승을 부렸다. 조금만 움직이면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지치고 싫증이 난 나는 의자에 앉아 무심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술에 걸리듯 서서히 오후 네 시의 무료함에 나를 맡겨버렸다.
맞은편 골목에는 큰 식당 두 개가 나란히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 옆의 고물상에는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스테인리스 재질의 고물들이 햇볕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 귀퉁이, 얼기설기 문짝을 엮어 놓은 가건물의 중간에는 조잡하게 '추어탕'이라 써 놓은 글귀가 삐뚜름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뒤섞인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일상이라는 시간의 수레바퀴가 잠시 멎어버린 듯 세상은 온통 고요하다. 거리는 침묵 속에 잠겨 있고. 오후 4시의 풀기 가신 햇살만 빈 골목을 지키고 있다. 내 몸과 마음은 스펀지처럼, 사방에 널려 있는 우울하고 쓸쓸한 감정의 입자들을 천천히 빨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내게는 참 친숙하고 편안한 감정들이다. 격조했던 옛 친구를 만난 듯도 하고, 또 다른 나 자신을 만난 것 같기도 하다. 아니, 한동안 잊고 있었던 한때의 내 자화상을 만났다고나 할까.
십여 년 전, 그때 나는 점점 진행하는 난치병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처음엔 낯선 병명도, 난치병이란 꼬리표에도 현실감이 없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병원 문을 나섰는데, 환한 햇살을 마주하는 순간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저 멍하게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울산이라는 낯선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내게 그곳은 일종의 유배지와도 같았다. 틈만 나면 화구를 싣고 나서던 스케치 여행도, 사람을 만나고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던 나의 활달함도 접어야 하는 곳이었다. 병으로 담장을 치고 달팽이처럼 집안에 들앉아 지극한 홀로가 되어갔다.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 없이 지냈지만, 진행성이란 의사의 말이 귓가에 떠나지 않았다. 시간의 보폭은 얼마나 느리던지, 홀로 밀어내야 시간이 고역이기도 했지만 문득문득 병이 데려다줄 미래라는 시간이 두렵기도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추수 끝난 들판에 선 듯 텅 빈 쓸쓸함만이 나를 넘실거렸다.
그러나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성치 않은 모습으로나마 꿈틀거리기엔 차라리 아무도 나의 어제를 알지 못하는 낯선 곳이 낫다 싶었다. 컨디션이 좋아질 때마다 산으로, 공원으로 혼자만의 나들이를 하기 시작했다. 홀로 운동하고, 기도하며, 묵상하고…, 혼자가 익숙해지자 쓸쓸함도 그럭저럭 즐길 만했다.
온통 바깥으로 향했던 내 촉수들을 안으로 돌려세우고 나니 나 자신에게 눈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내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늘 까치발로 종종거리던 나를 접고 보다 낮은 곳을 향해 시선을 두게 된 것도 그 즈음 내게 찾아온 변화였지 싶다. 비록 병에 발목이 잡혔지만 살아 있는 한 결코 병에 항복하지 않겠다는 전의를 다진 것도 쓸쓸함을 아군 삼아 혼자 보냈던 시간의 당당한 전리품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새로운 터전에서 불시에 맞닥트린 쓸쓸함의 예감 앞에서도 예전처럼 마냥 주눅이 들지는 않는다. 병이 허락하는 내 행동반경은 점점 줄어들 것이지만, 병이 아니어도 누구나 뼛속까지 쓸쓸한 것이 삶인 것을.
어둠이 서서히 내려와 안개처럼 깔린다. 순간 전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어둠을 걷어낸다. 간만의 청탁이다. 이사 때문에 한동안 밀쳐두었던 글을 다시 잡아야겠다. 제목은 '쓸쓸함을 위한 묵상'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