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변석(木變石) / 정여송 

 

몇 천만 년이 아롱져 있다. 침묵이 두텁게 흐를 뿐 어느 한 곳에서도 느슨함이나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장구한 세월이 농축된 만큼 단단함의 서슬이 빛을 낸다.

멀리서 볼 땐 영락없는 나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돌덩이다. 손으로 만져본다. 차다. 생각에 잠겨 응시하면 어떤 덩어리의 형체가 다가오고 또 생각을 내려놓고​ 바라보면 텅 빈 공간으로 펼쳐진다. 경북 영덕을 지나 강구라는 곳, 경치 좋은 도로의 휴게소 같은,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그것들이 모여 있었다.

규화목이다. 광물화된 나무의 유체遺體, 미이라, 제2 전시실에는 그것들의 속내를 발가벗기기라도 할 듯이 단면을 매끄럽게 가공하여 전시해 놓았다. 표면에는 쌓인 시간이 눌려져 있고 발자취가 그려져 있으며 기쁨인가 고통인가 싶은 무늬가 새겨져 있다. 알지 못할 어떤 뜻을 한 입 크게 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가가 가만히 안아본다. 그것에 녹아있는 삶을 마음으로부터 읽는다. 희미한 여백만 보인다. 조그마한 손전등이라도 들어야 할까보다. 다시 닭이 모이를 쪼듯​ 낱낱으로 쪼갠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난수표가 되고 만다.

세월이 과도하게 흐르면 나무도 돌이 되는가. 나무는 돌이 되기 위해 목숨을 버리고 돌은 나무가 되기 위해 열병을 앓아나보다. 신탁이듯 운명이듯 만난 돌과 나무, 그것들은 서로 배격하거나 대립하지 않았다. 되레 희망을 가지도록 위로하였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면서 '나'가 되었다. 그랬더니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가 사라졌다. 확고한 사실이나 진리라고 여겨왔던 것들도 무너져 내렸다. 나무 반, 돌 반이 될 수 있었던 증빙서류들이다.

옛날 아주 멀고도 먼 그 옛날, 수용성 규산은 진작 알아차렸다. 생물은 죽으면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또한 나무를 살려내고자 모험을 걸었다. 보통을 넘어선 생각으로, 뭔가 다른 관점으로, 보이는 면이 아니라 숨겨진 다른 면을 이해하려고 깊이 헤아렸다. 속 깊은 근심 걱정이고 거부할 수 없는 애정이었다.

어쩌면 괜한 일이라며 빠지지 말라고 붙잡는 생각과, 벅찰 정도의 커다란 짐이 될 수 있다는 부담과, 너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유혹 사이에서 위태위태한 줄타기를 했을 성싶기도 하다. 그러나​ 한다면 하는 것이고 하기로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밀고 나갔다. 수용성 규산의 숭고한 흐름이 시작되었다. 무지하게 오랜 세월을 쓰러진 나무속으로 사려 깊게 배어들고 또 배어들었다. 산소를 차단시키고 침입자와 전투를 벌이며 나무를 보호하였다. 지극정성으로 그 대담성은 반 범죄적이기도 하지만 영웅적인 행위이기도 하였다. 수용성 규산 스스로를 축복하는 질탕하면서도 엄숙한 축제였다.

쓰러진 나무의 속내도 엿들어 본다. 꺼져가는 생명에 불꽃을 당겨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면서 어디론가 가야만 하는 방랑자가 되었다. 애먼 일이었으니 그대로 소멸되기란 억울한 부분이 있지 않았겠는가.

우연이었다. 아니 필연이었다. 때마침 찾아든 수용성 규산. 나무는 정체불명의 말뚝에 강하게 묶이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불안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한 믿음도 생겼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무서운 밤길을 같이 걷는 기분이었겠지. 한두 걸음 옆에 동행자가 있다는 믿음만큼 든든한 게 어디 있을까. 머리는 여러 군데를 바라볼 수 있지만 마음은 바보처럼 한 군데만 볼 줄 아는 법.​ 단 하나인 마음의 눈으로 해바라기를 할 수 있었던 나무는 수용성 규산에 온전히 의지한 채 부활을 꿈꾸었다.

하얀 규화목. ​나무의 결은 숨을 쉬고 박힌 돌은 빛을 내며 조화를 이룬다. 줄거리 없는 섬세한 영상만으로 긴 울림을 주는 드라마다. 그것들은 암흑과 위험으로 가득한 이야기나, 끝부분이 걱정되어 알기 싫었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위대하거나 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것도 아니다. 나무는 그저 변화무쌍한 기후에 시달리다 쓰러졌고, 수용성 규산은 주어진 길을 어김없이 조금씩 성숙의 자세로 나아갔을 뿐이다. 그런 연후에 제 속도에 맞춰 운동량을 늘이듯이 천천히 변화하였다. 점점 화석화되면서 오팔처럼 수정처럼 굳어져갔다.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져 거대한 규화목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규화목을 '걸작, 사랑의 완성'이라고 말하련다. 세상을 향해 '영원한 사랑'이라고 소리치련다. '사랑가'를 창하듯이 노래하련다. 갖은 고통과 고난을 감내하면서 끌어안은 불멸의 사랑. 나무는 돌을 믿어주었고, 돌은 나무에게 힘이 되면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였다. 그것은 이해를 넘어선 완전한 사랑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복잡다단한 사람과 단순한 사람과의 화합을 만든다. 이념과 사상이 다른 나라와 나라의 벽을 허문다. 나무와 돌이 하나가 되는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도 창조해 낸다.

규화목을 에로스가 만든 문화재라 일컫는다. 진정한 사랑의 고백이요, 전설이며 신화이다. 그래서인가. 그것 앞에서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되었다. 숨김없이 내보이는 그것들의 힘겹고 두려워하던 모습, 흉측하면서도 황홀한 상처, 아름답고도 귀한 자태에 조용히 옷깃을 여민다. ​

 

profile